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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ae May 05. 2020

어느 거장 건축가와 가난한 도시

방글라데시다카 국회의사당과 루이스칸

 처음 다카에 갔었던 날을 기억한다. 네팔에서 1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글라데시 다카로 출장을 가게 됐었다. 방글라데시에 대한 큰 이해가 없이 처음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면서 마주한 어둠이 내린 넓고 길게 뚫린 고속도로 주변은 밤에도 밝은 가로등(당시 카트만두에는 일 년에 반 정도는 전기가 없었다)과 거리마다 가득 찬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카는 카트만두보다 많이 발전했네’


다카를 카트만두보다 앞 줄에 세워둔 기준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자주 들어본 말이 있다.


‘여기는 한국의 70년대 같다’


 한국의 발전의 역사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의 발전의 정도를 바라보는 것은 비단 우리의 일만은 아니었다. 다카를 거쳐 간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험에 빗대어 그 나라의 발전정도를 가늠했다. 넘쳐나는 사람들과 교통체증, 도시에 가득한 소음 등을 보고 으레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경험한 개발의 경험이 잣대가 되어서 다른 세계가 가야할 길을 정해주고 있다. 나도 모르게 이들이 빨리 '우리나라'의 현재처럼 개발되어야 할텐데-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지 않은가.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말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실현할 힘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다면, 그 곳에 도로가 생기고 의회건물이 바뀌고, 법이 바뀌는 일들이 일어난다. 방글라데시 다카에 있을 법하지 않은 건축물들이 외부인의 의지로 세워지는 일이 그래서 일어난다.


 1945년 포츠담 선언 이후 서구세계에서 성공한 건축가들은 국제원조와 인도주의 물결에 힘입어 제 3세계에서 작품 활동을 할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50년대 인도 찬디가르의 르꼬르뷔제의 도시계획이라던가, 여기서 이야기할 루이스칸의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같은 건물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미 도시계획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던 유럽에서 온 건축가들은 마치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모더니즘을 소개하는 도시와 건축물을 그려냈다. 미개한 세계의 계몽을 위해 서구세계가 겪은 근대화에 대한 이상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구현해내기 원했고, 자연스레 기존에 그 도시나 국가가 가지고 있던 토착적인 것들은 변화되어야할 것들로 간주되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이후 개도국에서 이루어진 서양 건축가들의 작업을 후기식민주의양식으로 부른다.


1956년 르꼬르뷔제가 설계한 찬디가르 고등법원


 르꼬르뷔제가 계획한 인도 찬디가르는 ‘실패한 개발'로 평가받는데, 이는 인도의 자연적, 문화적 맥락과 전혀 상반된 계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2016, 손세관 등).




거장 건축가의 삶의 양면성

 나는 자주 르꼬르뷔제같은 건축계의 거장들을 모르는 사람에게 면박을 준 일로 되레 면박을 받은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언급을 하자면 이번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루이스칸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유명한 건축가이다. 미국 현대 건축가이자 모더니즘 건축 최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경력 초기에는 주로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고 후기에는 세계로 여행을 많이 하며 그로 얻은 깊은 통찰로 '킴벨 미술관'이나 ‘소크 생물학 연구소'같은 아름답고 건축사에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나는 학교 때  들기도 어려운 이 사람의 작품사진집을 보며 건축가로서의 그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에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세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지만 자식들은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라게 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에게 그의 죽음은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는데 평생 돈보다는 이상적인 건축을 추구한 나머지 말년에 파산에 이르게 되고 73세에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쓸쓸하게 죽었다. 세상을 주름잡은 건축가였음에도 그의 신원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 3일간 무연고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My Architect, A son's journey"라는 루이스칸의 아들 나다니엘칸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도대체 나에겐 잘해준 것 하나 없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왜 이렇게 유명한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안타까운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이스칸과 그의 아들의 다큐멘터리 My Architect



루이스칸과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그의 말년을 파산으로 이끄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건축물이 바로 현재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있다. 루이스칸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가받고 나다니엘칸의 다큐멘터리 포스터(윗 사진 참고)에 등장하기도 하는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이다. 방글라데시 10타카 지폐에도 등장하는 이 건물은 방글라데시 인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다카에는 많이 갔었지만 이 건축물에 방문할 기회는 딱 한 번 있었는데 거대하고 압도적인 형태를 가진 콘크리트 건물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가벼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외관을 갖고 있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같은 건축적 이상을 구현해 낸 루이스칸의 집념이 보였다. 내부에는 현대 다카에서도 볼 수 없는 모더니즘 시대의 가구와 전등 등이 장식되어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구한 듯한 것은 찾을 수 없었고 모든 가구와 부자재를 유럽과 미국에서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에 기함을 금치 못했다. 내부공간은 상당한 역동성이 있어서 외부와 내부가 소통하는 공간과 루이스칸의 건물답게 빛이 벽의 형태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공간은 의원들의 회의 공간으로 천창을 통해 빛이 가득 떨어졌고 야간의 회의를 위해 허공에 달린 전등은 얇은 줄에 매달려 낮 동안의 공간으로의 빛의 소통을 막지 못하게 했다.



국회의사당 회의 공간(출처: Daniel McCarthy Architect LLC)



 국회의사당을 방문하는 내내 거장의 작품을 감상하며 마치 어디 먼 곳에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에 젖어들었던 것도 잠시, 다시 다카의 거리로 나오니 구걸하는 아이들, 슬럼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건축물이 얼마나 방글라데시라는 나라의 기후, 문화, 건축적 특징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는지가 보였다. 매년 홍수로 고통 받는 삼각주에 위치한 땅에 굳이 물을 가두어 호수를 만들어 건물을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이 미국인 거장 건축가에게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방글라데시의 현실은 국민들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그 장소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외관(직접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 수 있는 사진의 질ㅠ)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직접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 수 있는 사진의 질ㅠ)


간략한 방글라데시 근대사

 이 국회의사당과 관련된 방글라데시의 간략한 근대사는 이러하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현재 방글라데시 땅은 종교적 동질성의 이유로 파키스탄의 한 주로 분류되었다. 그 결과 인도와 네팔을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종교를 제외하고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던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 서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 영역을 지배하면서 동파키스탄은 실질적인 식민지배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의 민족운동을 억압하고 수월한 통치를 위해 파키스탄의 제2의 수도를 다카에 세우기로 하고 주의회의사당 등의 계획을 1960년 초에 루이스칸에게 의뢰하였다. 이 건물이 현재 방글라데시의 국회의사당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던 인도의 도움을 받아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전쟁에 승리해 독립을 하면서 현재의 방글라데시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1963년에 착공을 한 이 주의회의사당 건물은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후인 1983년에 완공되었고 루이스 칸은 방글라데시를 오가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음에도 이 건물의 준공을 보지 못하고 1974년에 사망했다. 원래 예정된 공사 기간보다 상당히 지연되었다고 하는데 공사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린 이유는 루이스 칸의 완벽주의 성향과 자재와 장비 수급의 어려움 등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본인들이 계약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빚은 그대로 칸의 자녀들에게로 대물림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많은 업체들의 대금이 여전히 미지급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은 모더니즘 건축의 역작이며 세계건축사에 큰 의미를 갖는 것임은 분명하다.


 서양모더니즘을 방글라데시에 실현하고자 했던 칸의 의지는 실로 대단했는데, 건축이 한창이던 1970년대의 방글라데시에는 대형 콘크리트 건축물을 지을 기술도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부들은 거대한 거푸집에 손으로 직접 콘크리트를 실어 부어야 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인들에 대한 착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건설 환경도 시장도 이와 같은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임에도 그가 이루어내고자 했던 근대건축의 이상에 대한 의지란 실로 대단했고 훌륭한 건축작품으로 이상을 실현했다. 그리고 현대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파키스탄에 의해 계획되고 미국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이 건축물을 사랑한다.

(물론 나의 가까운 방글라데시 친구들 중에는 이 건축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My Architecture: A Son's Journey 중 아들에게 아버지가 이와 같은 큰일을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눈물 흘리는 방글라데시인



 다카라는 도시에 이와 같은 거대 모더니즘 양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명한 근대 건축가의 유작이 있는 명예로운 도시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국회의사당조차 지배국가가 데려온 미국인 건축가에게 맡겨야 했던 어두운 역사의 산물로 평가받아야 할까. 그것 또한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국회의사당이라는 정치의 공간이 국가의 발전에 갖는 중요성을 미루어볼 때 이 건물의 건축사적 중요성과 방글라데시에서의 역사적 가치는 구분해 평가해야하는 것 아닐까.




다카와 국회의사당(도시조직 차이 무엇..;)








지배당하지 않음에 대해서

 글을 마무리하며 처음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던 그 날을 다시 떠올려 본다. 공항에서 시내로 연결된 고속도로를 지나니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제대로 걸을 수 없이 사람으로 치이던 인도, 수도 없이 많은 릭샤운전사들, 아주 어린 나이에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이들, 화장실도 없는 슬럼가 주택들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다카 시내는 외국인이 걷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구걸하는 아이들이 따라붙는다. 길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늘어나는 인구와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도시, 매년 반복되는 홍수, 늘어나는 슬럼, 불안한 치안, 이 국가에서 정치가 갖는 가치를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공간에 어떻게 담겨야 할까.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한 근대건축은 가난한 국가의 발전상황과는 맞지 않는 신기루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 지역의 건축의 역사성은 축소시키면서도 근대건축의 위계와 효율성의 가치를 강하게 주입했다. 그로 인해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근거한 총체적인 건축과 도시계획이 어려워졌고, 어디서부터 출발일지 모를 수많은 도시 문제들을 양산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역사화 문화적 환경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형성되어야 했다. 그 공간이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민주정치의 공간이라면 그 곳이 갖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다카의 국회의사당 인근을 지나다 보면 다카라는 지역적 특성은 매몰되고 마치 건물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중동 어느 도시에 순간 이동해 있는 것 같다가 북아프리가 어딘가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있지도 않은 방글라데시의 왕이 살 것 같은 궁전 같기도 하다. 루이스칸은 정치인들을 다카에는 있지도 않을 법한 호수와 신기루와 같은 근대 공간에 가둠으로써 정치의 공간을 방글라데시의 현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공간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리고 그 곳의 정치인들은 역사적 피지배의 공간을 현재 자신들의 지배의 공간으로 재활용했다.


 건축사적 가치에 매몰되어 역사적 비판은 뒤로하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그 공간에 담는 것은 국민들의 역사인식과 함께 방글라데시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공간이 갖는 힘이란 그렇다.


 국회의사당이라는 정치적 공간이 거대하고 근대적이고 권위적인 공간이 아닌 방글라데시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냉철한 역사인식에 기반을 둔 공간의 가치를 만들고 보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재탄생시켜야 한다.


 나아가 오늘도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원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지배”에 대해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을 기반에 둔 다양성이 고려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든 그들의 문제를 이제는 그만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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