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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ae Aug 07. 2021

우리에게 광화문 광장이 어떤 장소인데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를 바라보며



광화문 광장에 오래도록 가보지 못했다. 일 때문에 광화문을 지날 일은 있었지만 항상 일정이 있거나 동행자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고 건널목을 건너서 가야 하는 광장에 들리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공사 때문에 접근이 어렵기도 했고 차도로 광장으로 가는 동선이 단절되어 있어 '일상적 경험'은 주기 어려운 장소이기는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광화문 광장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미루어 볼 때 ‘그곳’은 일상적 광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이다.


   외국인 친구와 함께 광화문 광장을 지나다가 세월호 천막에서 나누어 주던 노란 리본을 받아 가방에 나누어  적이 있다. 그리고  친구에게 당시 사람들이  그곳에서 계속 머물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친구는 이렇게 서울에서 ( 앞이라는) 중요한 공간에서 슬픈 일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했고, 당시 나는 세월호는 우리에게는 단지 하나의 슬픈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시스템 변혁에 대한 커다란 요구를 가져다준 사건이라고 이야기했다. 천막은 평화로웠고, 소란스럽지 않았으며, 도심에서 천막 안의 사람들은 시민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의 일상과 누군가의 응집된 목소리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만남이 다이나믹하게 연결되고 계속적인 사회적 집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바로 광화문 광장이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이 완전한 ‘일상적 광장’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광화문 광장의 '장소성'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광화문 광장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어났던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의 기억이 공간에서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만들고 역사 안에서 소외된 인간이 아닌 스스로의 위치를 점검하고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해방 이후의 도시개발로부터 공간적인 것들을 삭제해 왔다면 앞으로의 개발에서는 공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광화문 광장은 완전히 일상적인 공간은 될 수 없는가. 이곳은 조선왕조 시절에는 경복궁을 향해 6개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6조 거리였는데, 과거 시험이나 중국 사신의 환영식이 열리곤 했다. 이 시기에는 권력의 공간이자 귀족의 공간이었고, 평민들은 골목 뒤에서 귀족들의 삶을 엿보곤 하던 그런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경복궁 건물 일부를 부수고 그 앞으로 조선총독부를 짓고 이전 조선의 관청들을 군사나 통신을 관장하는 건물들로 갈아치웠다. 이때 근대건축물들이 이 공간에 지어졌다. 과거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던 6조 거리의 축을 틀어서 조선총독부와 조선신궁을 잇는 새로운 축을 만들어 도로의 축을 틀어버렸다. 식민정부가 틀어버린 축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히려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정부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간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도로의 넓이를 더욱 확장하면서 식민정부가 틀어버린 축을 되돌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해 버린 꼴이 됐다. 그리고 서울의 교통과 언론, 경제의 중심이 되어 왔다.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기 전까지 이 공간은 권력의 공간이었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이 공간을 개조함으로써 권력을 과시해 왔다.


하지만 근 십수 년 사이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난 변화는 '권력의 시민으로의 이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세 가지 정도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1995년의 조선총독부의 철거였고, 두 번째는 2009년의 광화문 광장의 조성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가 2016년의 촛불 혁명이었다. 첫 번째는 식민의 공간을 철거함으로써 한국사회에 민족적 자존감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식민사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와 이익이 그 건물의 역사적 의미보다 더욱 컸기 때문이고,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광화문의 역사적인 모습을 되돌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정치권력을 시민에게 이양하는 민주주의의 공간을 만든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물리적인 변화가 사회적인 변혁의 결실을 맺었던 것이 촛불 혁명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주체적인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일어났고 그렇게 바꾼 정권에 대한 현재 평가가 어떠하든지 시민들 개개인에게 상당한 '정치적 효능감'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이 광장의 주인은 권력자들이었지만 현재 광화문 광장의 주인은 시민이 되었다. 상징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다는 것도 촛불 혁명을 통해서 한국사회가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시에서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한다고 한다. 재구조화 공사 때문에 임시로 이동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복귀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구조물도 없는 광장에 대한 계획이 전임 시장 때부터 세워져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말에서 공간의 기억을 삭제하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광화문 광장은 재구조화 공사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목소리가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누구나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외칠 수 있어야 하고 억울한 목소리가 동료 시민을 만나서 공감을 구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광화문 광장의 현재가 여전히 권력의 공간이라면 그 권력의 주인이 바로 시민이다. 재구조화 이후에도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해 요구하고자 하는 시민들은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와 사회적 기억, 경험이 구성해 낸 현재의 광화문 광장의 장소성이다. 힘들게 만들어 낸 민주주의의 광장을 다시 권력에 반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광장에 모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다.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작은 목소리들, 공동체의 경험까지 함께 사라질까 조마조마하다. 이 경험을 남기고 기억하려는 노력을 통해 공동체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투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종종 일종의 경험입니다. 공적 공간에서 육체적으로 한데 모이는 경험,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경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는 경험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힘의 경험입니다.

역사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걷기의 인문학, 2017, 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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