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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May 29. 2017

나의 금남로

칼라스타킹. 그것은 나의 중학시절 국어 교사의 별명이었다. 갖가지 색상의 화려한 스타킹을 신는 걸로 유명했던 그녀는 수업 시간이 되면 목청 높여 시를 낭독해대곤 했다. 야유하는 열다섯살들에게 나중에 커 보면 자신이 시를 읽어주던 모습만 기억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굴었다. 그리고 정말 지금도 칼라 스타킹의 시를 읽는 모습은 내 기억속에 모래알처럼 박혀있다. 그때의 어떤 기억으로 인해서.


  막 하복으로 갈아입은 산뜻한 오월에 칼라스타킹은 숙제를 내줬다. " 교과서에 나온 시인의 또 다른 시를 찾아서 발표하기"가 그것이었고 나는 망설임없이 고은 시인을 내 발표의 주인공으로 정했다. 나는 고은 시인을 좋아했다. 그가 쓴 열매 몇 개 라는 시가 좋았다. 그 시처럼 자연의 서정을 노래한 또 다른 시를 발견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시인의 명성과는 별개로 그의 시집은 서가의 제일 아랫칸에 처박혀 있었다. 나는 책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후 즐겁게 읽었고 그 중에 마음에 들었던 시 한 편을 골라 발표에 쓰기 위해 복사를 했다. 복사는 장당 40원이었고, 그 시의 제목은 "금남로"였다.


 나는 칼라스타킹을 좋아했다. 칼라스타킹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수학은 11점, 국어는 98점이 나와서 면담까지 했던 좀 이상한 아이인 내게 국어는 이따금 시 쓰기를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쓰려면 우선 읽어야하고, 읽은 후엔 내가 알고있는 것들에 대해 쓰고, 그 다음이 지어낸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단계라고.
 내가 찾아낸 그 시는 교과서에 실린 고은의 그것과는 어딘지 달랐다. 난 바로 그 점이 내가 국어 숙제를 열심히 했다는 증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는 뜨겁고 무겁고 비장했다. 금남로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는 내가 몰랐던 시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줬고 금남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나는 칼라스타킹이 나의 발표를 듣고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쓴 시대적 배경이나 개인사 따위를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것이 그녀의 평소 수업 방식이었고,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나는 복사 해 온 시를 조별로 나눠주고 칼라스타킹에게도 한 부를 줬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내가 조사한 고은의 시를 낭송했다. 시의 전문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에와서 다시 찾아보려고 해도 정보가 전무하다. 제목이 "금남로"가 맞았는지 조차 희미하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나의 금남로.

 발표가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본 것은 사색이 된 칼라스타킹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주위를 살피는 듯 하더니 서둘러 모든 복사본을 걷어서 챙겼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질문도 이의 제기도 허용되지 않았다. 수업은 도망치듯 일찍 끝났고 나는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애 써봤다. 모욕적이었다. 칼라스타킹은 내가 준비한 발표 자료를 회수할 권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표 자료를 몰수했고, 어떠한 의사 표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최초로 당한 검열이었다. 나는  칼라스타킹이 미워졌다. 그녀의 교사로서의 자질이 의심됐고, 원래도 요란했던 스타킹은 더더욱 천박하게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칼라스타킹에 대한 이 껄끄러운 추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모래알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봄 신문 기사속에서 금남로 라는 세 글자를 읽고 난 후에야 나는, 겁에 질린 그 눈빛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나의 어린시절 대학생들은 늘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뉴스만 틀면 최루탄 연기 속에서 마스크를 쓰고 데모를 하는 대학생들을 흔히 볼 수 있던 때였다. 유치원생이던 나는 대학생은 데모를 하는게 직업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금남로가 5.18 민주화 항쟁이 벌어진 광주의 지명이라는 것, 고은 시인은 그 폭풍의 한 가운데를 치열하게 관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성인이 된 후에 우연히 알았다.그리고  그 가해자가 뻔뻔스럽도록 건강하고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전재산이 29만원 뿐이지만 골프장 그늘집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유명하단다. 그는 지난 5월 9일에 투표권도 실시했다.민주주의의 파괴자가 민주주의가 보장한 권리를 행사하고 그 결과를 누린다.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내가 제도권 교육을 받았던 20여년 전에는 2학기 기말고사 시기가 되면 국사 교과서의 특정 범위까지만 배우고 수업을 사실상 종료했다. 시험 일정 때문이라는 명목을 걸었지만 그 범위는 왜인지 비슷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배웠고 그 이후는 기계적인 훑어보기 아니면 아예 생략하는 식이었다. 이 페이지 이후로는 아예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안 봐도 된다는 국사 선생의 말에 시험범위를 쉽게 파악하도록 근현대사 페이지는 아예 반으로 접어 펼쳐지지 않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 이유는 천 년전의 삼국시대 무슨 왕이 어떤 이유로 그러한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선 낱낱이 조사하여 배우게 하면서, 겨우 50여년 전에 있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군사 정권" 이라는 짤막한 한 줄로 읽기만 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가르치지 않고 넘어가고 싶어하는 느낌마저 줄 정도로 극과 극이었다.

 칼라스타킹이 수업 중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선진국일 수록 투표율이 낮다."
 그때는 막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던 때였고, 내 어머니는 IMF 여파로 회사가 부도나자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팔고 계셨다. 그리고 선진국 중 하나인 호주의 최근 10년간 평균 투표율은 94.8%이다.

나는 오월의 그 분들 덕분에 오늘의 세상이 있음을, 최루탄 견뎌가며 목숨바쳐 투쟁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유권자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 지금 이 세상을 바꾸고 있음을  실감한다. 불의에 분노하고 미래를 위해 자신의 넋을 바친 이름 모를 수 많은 타인 덕분에 내가 인터넷에 하고 싶은 말은 아무 말이나 하고, 박근혜가 탄핵 되는 날 기뻐서 방방 뛸 수 있었다. 그 분들께 감사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또한 몰랐다고 변명하며 금남로의 슬픔을 눈 감고 외면했던 나의 파렴치함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칼라스타킹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이야기 해야 할 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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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저작권: 한겨레

글: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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