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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Sep 14. 2017

20원을 남겨둔 사람

  나의 출근길에 공중전화가 오도카니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은 그 공중전화의 철거 날이었다. 빨간색 덕테이프를 포승줄처럼 칭칭 동여매고 조용히 폐기를 기다리는 하늘색 공중전화 박스. 철거 예정이라고 휘갈겨 쓴 종이 쪽이  없었다면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취객에게 발길질이라도 당했는지 아래쪽 유리는 아예 깨져나가 없고, 한때는 반질반질하게 닳았을 발판이 이제는 붉게 녹슬어 슬퍼 보였다. 전화박스의 핵심인 전화기는 진작에 뜯겨나갔다. 내장이 텅 빈 채로 가을바람을 뱃속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스마트한 세상의 무관심이 집약된 성지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를 찾아 동전을 집어넣어야 했던 게 불과 십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해외 학위도 딸 수 있는 요즘과 비교하면 요금이 결제될 때마다 딸칵거리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나던 옛날 공중 전화기는 조선시대 유물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전화를 하기 위해 일부러 동전을 남겨두곤 했고, 동전을 얻기 위해 지폐를 바꿀라치면 왠지 눈치가 보여서 사탕이나 껌을 부러 사는 일도 있었다.

 목 좋은 공중전화는 늘 인기가 있었다. 역 앞이 그랬고, 한적해서 조용하게 통화하기 좋은 아파트 단지 근처가 그랬다. 가을밤 울어대는 샛노란 은행 그림자 밑에 고요히 서 있던 하늘색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드는 발길은 설렘에 젖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안에 담배꽁초 서너 개를 눈물처럼 떨구고 갔다. 과연 보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궁금했던 전화번호부엔 가나다 순에 맞춰 이름과 번호 7개가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2017년이라면 개인정보 유출이라고 고발당했을 일이지만 1997년도엔 바뀐 전화번호부를 충분히 배포하지 않은 한국통신을 비판하는 신문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3분에 30원. 1992년의 공중전화 요금이다. 내가 넣은 동전이 투입구를 통해 전화기 안의 동전 더미 위에 떨어지면서 기분 좋은 돼지 저금통 소리를 냈다. 100원이 들어가면 "반환되는 돈" 70원과 "통화는 가능하나 반환되지 않는 돈" 0원으로 분할되는데 후자를 낙전이라고 불렀다. 10원짜리까지 칼같이 계산해서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10원, 20원씩 남기 마련이었고 그럼 매정하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대신 다음 사람을 위해 낙전을 남겨둔 채 수화기를 올려두는 것이 그때의 미덕이었다.

 급하게 찾은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걸지 않고 올려둔 수화기와 빨갛게 불 켜진 낙전 20원을 발견하면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10원만 더 넣으면 3분 동안 통화를 할 수 있었으니 먼저 다녀간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스마트폰은커녕 컴퓨터도 귀하던 그때에 공중전화는 장난전화도 걸고, 약속 시간이나 안부를 묻는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버스 정류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삐삐 사서함을 확인해보던 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음성 다이렉트 메시지쯤 되는 삐삐는 방금까지 같이 있던 친구가 굳이 8282를 붙여가며 삐삐로 연락을 보내게 만드는 신묘한 물건이었다. 지금은 삐삐도, 공중전화도, 64화음을 자랑하는 최신형 폴더폰도 모두 발전하는 기술에 떠밀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어쩌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어도 공중전화를 찾지 않는다. 양해를 구하고 남의 휴대전화를 빌리는 것도 하지 않는다. 급속충전기가 있다는 편의점에 찾아가 요금을 지불하고 배터리가 10%라도 차기를 기다리며 멀뚱히 창밖을 보는 것을 선택한다. 스마트폰을 갑자기 빌려 달라고 하면 의심부터 살 것이 부담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지금 합정역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내가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깨알같이 수기로 정리해 둔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공중전화는 찾기도 어려운 데다 동전은 고사하고 현금 자체를 안 가지고 다닌다. 10원으로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멸종된 지 오래다. 머릿속에 남은 숫자라곤 남편과 친정식구들의 전화번호 서너 개뿐. 타인에게 손전화를 빌려 주기는커녕 눈을 쳐다보는 것조차 가급적 피한다. 길을 물으려고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 취급을 당하니 차라리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게 된다. 호이가 계속돼서 둘리로 가득 차버린 세상에서 일면식 없는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은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거당하는 공중전화는 슬프다. 다음 사람을 위해 남겨둔 20원이 사라져 버린 세상은 어쩐지 맛이 없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버려 둔 채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과 카톡을 주고받는 2017년은 확실히 빠르고 편리해졌지만, 애수가 실종됐다. 원하면 언제 까지든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대화를 보류할 수 있는데 이제 와서 반드시 두 개의 전화기 옆에 당사자가 있어야만 연결이 성사되는 유선 전화를 그리워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애초에 감정은 효율의 잣대로 계량할 수 없다. 그리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관계의 의무다. 공중전화 낙전 20원을 디딤돌 삼아 연결될 수 있던 세상은 대화를 보류할 수도, 보존할 수도 없었다. 그때의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적나라하게 박제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만큼 모호했기에 돌이켜보면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2017. 09. 14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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