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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Oct 27. 2017

행복하면 불안해져요

 오랫동안 지켜봤던 사람과 연인이 되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입사했습니다. 마음 졸이며 기다려왔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자 터질 것 같은 행복이 물 밀듯 밀려옵니다. 달콤한 기쁨에 막 뛰어들려는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고 속삭입니다. 금방 다시 불행해질 거야.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곧 들이닥칠 더 큰 불행에 대비하려면 필사적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행복에 마취돼 붕 떠 있다가 불행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 겨울 벌판에서 긴장을 풀면 갑자기 몇 배는 더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마음의 긴장을 늦추면 더 큰 불행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불행을 찾아내려 애를 쓰느라 행복의 과실은 본 체 만 체 하고 지나쳤습니다. 불행으로 팽팽해진 긴장감 때문에 나의 오감은 막히고 사고력마저 떨어졌습니다. 기뻐해야 마땅한 보상조차 음미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불행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어쩐지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일이 생기면 불안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반드시 같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행에 길들여진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행복한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불행을 연상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반복되자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행복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마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겐 불행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불행으로 가득 찬 내 삶에 어쩌다 좋은 일이 한 번 일어나면 마치 행복이라는 동물을 처음 본 원시인처럼 어색하게 그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행복이 마땅한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일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만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보다 불행이 더 익숙한 사람, 좋은 일에 기뻐하기보다 슬픈 일에 눈물 흘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정의해버림으로써 행복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 불행의 고통을 감당하는 게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날이면 귀신같은 불안이 내 허리춤을 쿡쿡 찔렀습니다. 지금 이 평온은 연극이라고, 한 꺼풀만 벗기면 지옥 같은 불행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불안은 나에게 어서 마취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은밀하게 속삭였습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발 속의 돌멩이처럼 나를 불편하게 하고 마음 쓰이게 하는 불안의 정체는 바로 한 톨이라도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집착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불안을 꾸역꾸역 삼키다 숨이 막히면 술 취한 사람처럼 불행을 토하고 다녔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다시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나는 나 자신과 나의 가족, 내가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을 이미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을 10으로 잡는다면 나는 행복이 8이나 9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모 아니면 도, 행복 아니면 불행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행복도 불행도 아닌, '아무렇지 않음'이었습니다. 

 불행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한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날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박처럼 집착했던 행복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습니다.


 왕자는 공주가 예쁘기 때문에, 공주는 왕자가 왕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듯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에서 동화는 끝나 버립니다. 결혼만 하면 그 뒤로는 순도 100%의 행복만 있어서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듯 말입니다.

  '신데렐라는 호박을 따 왔다'는 짧은 장면 속에는 호박밭까지 가는 번거로움, 딴 호박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호박잎에 진드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같은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백설공주가 난쟁이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모습은 자세하게 묘사되지만 화장실 변기 크기가 공주에게도 적당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우처럼 영원토록 행복한 인생은 동화 속에만 존재할 뿐. 그것을 진짜 인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평생 설탕만 퍼 먹고 산다면 단맛이 달다는 사실 조차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짠맛, 신맛, 쓴맛이 있을 때 비로소 단맛은 그 진가를 발휘할 기회를 얻습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지만, 영원히 지속 가능한 내적 평화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불행이 인생의 필수 비타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이 영원한 나라로 가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셈입니다. 





글 그림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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