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스 노트
아침햇살 가득한 버스 차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리스본에서였다. 사람들은, 그리고 거리의 풍경은 느리게 움직였지만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서울의 거리에서보다는. 시간은 서울에서보다 더디게 흘렀다. 아니 어쩌면 서울의 시계가 너무 빠른지도 모른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리스본행 비행기를 갈아타고 현지에 닿은 것은 출발한 지 18시간이 지나서였다. 시차는 8시간(서머타임 적용 9시간) 한국이 빠르다. 마중 나온 포르쉐 카이엔을 타고 호텔로 향하는 시간, 밤이 깊어 사위는 어두운데도 거리 곳곳에는 젊음이 넘쳐나고 있다. 누군가 “리스본은 파티의 도시”라고 말한 것 같다. 단단한 노면 사이로 레일이 깔려 있고, 양옆으로 차들이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좁은 거리를 카이엔은 능숙하게 빠져나간다. 리스본의 첫인상은 그렇게 잠들지 않는 밤의 풍경으로 다가왔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아침은 전차가 다니는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전차는 리스본의 명물이자 상징이었다. 요즘은 보기 드문 전차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와 낯선 여행지에서의 우수를 안겨준다. 그것은 언젠가 추억이 될 것이다. 리스본의 거리는 특별히 화려하지는 않지만 과거와 현재가 차분하게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다가 가까웠다. 아침 시간 잠시 짬을 내 리스본의 풍광을 눈에 담고 다시 공항으로 출발이다.
911 터보 시승차들이 준비된 공항을 출발점으로 에스토릴 서킷까지는 70km 거리, 신뜨라(sintra)와 까스까이스(cascais) 등 포르투갈의 다양한 지방도로를 달리는 것이 첫 일정이다. 호텔도 서킷 주변에 있어 사실상 리스본과는 만나자마자 이별이다.
리스본에서 신뜨라 지방의 로까곶(Cabo da Roca)이며 까스까이스 지방의 해안도로를 포르쉐 뉴 911 터보를 타고 달렸다. 로드맵 하나만 보고 가는 낯선 지역에서의 시승은 늘 그렇듯 조심스러웠다. 포르투갈의 길은 대부분 좁았고 고속도로라 해도 일직선은 거의 없이 꾸불꾸불한 코너가 이어졌다. 비교적 평탄한 구간에서 속도를 내보았다. 1차선을 타고 가다 빈 차선으로 추월하려 하는데 앞차가 미리 알아서 비켜준다. 마치 바닷길이 열리는 것처럼. 자기보다 빠른 차에 대한 양보는 자연스럽다. 심지어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좁은 2차선, 앞서 가는 육중한 트럭조차 예외는 없다. 물 흐르듯 길의 흐름이 이어진다.
911 터보는 지난 1974년 980 터보 3.0으로 처음 등장했고 최고출력 260마력에 0→시속 100km 가속 5.4초의 성능을 냈다. 이후 2006년 8번째로 변화한 997 터보 3.6은 최고출력 480마력에 0→시속 100km 가속 3.9초의 성능으로 발전했다. 오늘 만나는 9세대 터보의 특징은 1992년 5세대(964 터보 3.6)부터 사용해온 3.6L 엔진에서 배기량을 200cc 키운 3.8L 엔진으로 교체했다는 점. 새로운 엔진은 카레라 S에서 가져온 3.8L 수평대향 엔진을 손본 버전이다. 0→시속 100km 가속은 수동 기어가 3.7초로 0.2초 단축되었고 자동 기어가 3.4초로 0.3초 단축되었다.
이처럼 성능이 향상되었음에도 차체 무게를 25kg 줄이고 연료소모량이 16%나 감소했다는 점, 더불어 CO2 배출량도 최고 17.8%나 줄였다는 게 포르쉐의 자랑이다. 단지 성능의 극한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환경과 효율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달라진 지구환경에 보조를 맞춘다는 스포츠카 브랜드의 새로운 적응전략이다.
로까곶(Cabo da Roca)에 도착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오직 끝없는 수평선과 바람만이 가득했다. 십자가를 떠받치고 있는 비석에는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포르투갈의 시인 까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어디선가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조용했던 풍경이 부산스러워진다. 바다를 뒤로 하고 에스토릴 서킷으로 향했다.
오후 4시의 태양은 여전히 강렬함의 정점에 머물러있는 듯했다. F1 그랑프리가 열렸던 유서 깊은 에스토릴 서킷에 911 터보들이 속속 도착했다. 서킷에는 과거의 터보 모델과 르망 24시간 우승에 빛나는 911 GT1 경주차, 그리고 현재 포르쉐 로드카 테스트 드라이버이자 전설적인 랠리 드라이버 발터 뢰를(Walter Rohrl)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정밀하고 날카로운 운전과는 달리 그는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서킷 데모 주행과 슬라럼, 론치 컨트롤 연습시간 등이 주어졌고 그다음 날에도 도로주행과 서킷 주행이 온종일 이어졌다. 하루 종일 차만 타도 행복한 시간이란 이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사이로 시간은 터보만큼이나 빠르게 달아났다. 911 터보를 타고 달린 신뜨라 지방의 그림 같은 절벽과 그 위로 촘촘히 들어선 집들, 로까곶이며 까스까이스 지방의 아득한 풍광들이 가슴에 남았다.
2009.12월호 @autocar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