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풍경
반도의 사전적 정의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육지에 이어진 땅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한반도라고 일컫는 이유다. 유럽 대륙의 남부에서 지중해로 튀어나온 반도가 이탈리아다. 그래서인지 기질적으로 우리나라와 이탈리아는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마세라티는 1914년 볼로냐에서 창업해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었다.
1920년 마세라티 형제의 한 명인 마리오 마세라티가 마조레 광장에서 넵투누스 조각상이 들고 있는 삼지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마세라티 엠블럼이다. 프런트 그릴과 양쪽 어깨에서 마치 왕관처럼 빛나는 그것 말이다. 마세라티 엠블럼에서 넵투누스 즉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마세라티를 보면 바다가 떠오르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마세라티 모델에 바람과 연관된 이름이 많다는 점도 우연은 아니다. 기블리는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지중해의 바람은 온화하면서도 순간 저항할 수 없는 강풍으로 돌변한다. 마세라티는 자신의 첫 SUV에 이와 같은 성격을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차 이름을 아랍어로 지중해 바람이라는 뜻인 ‘르반떼’로 짓고, 전체적인 실루엣을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뽑아냈다.
통영은 지난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군과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1일 충무시와 통영군이 다시 합쳐져 통영시가 되었다. 충무라는 이름은 시호 충무공에서 따왔고, 통영은 통제영의 줄임말이니 도시의 이름에서부터 이순신 장군과 뗄 수 없는 관계다.
통영 앞바다가 바로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파도를 일으키고 대지를 진동시킨다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가 그리스 신화라는 신화 속 인물이라면 이순신 장군은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로 우리 바다의 진정한 신이다. 아마 넵투누스조차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영 여행의 시작점은 어선들과 거북선이 정박해 있는 강구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듯 통영에 오면 먼저 충무김밥을 먹고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보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저편으로 언덕 위 하얀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그야말로 이국 정서에 빠져들게 된다. - 통영은 90년대부터 건축심의에 따라 지붕은 오렌지색, 벽은 흰색으로 권고하고 있다 -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1962년)에서 통영이 묘사된 대목에서 나왔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살기 좋고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었을까. 통영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만큼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해,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그리고 ‘토지’의 작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 등이 그들이다. 섬이 많아서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발자취와 그들이 남긴 이야기가 많은 곳도 통영이다. 사거리 교차로에 있는 충렬사도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모신 충렬사 길 건너편에는 사당의 제향에 쓸 목적으로 판 우물 명정 샘이 있다.
명정 샘 앞에 동판으로 만든 원고지 한 장이 눈에 띄는데,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이곳 명정 샘을 묘사한 대목이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 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은 이곳 충렬사 계단에 앉아 명정 샘을 바라보며 시 한 편을 지었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문장이 들어있는 ‘통영 2’라는 시다. 백석은 서울에서 우연히 첫눈에 반한 여자 ‘란’을 만나기 위해 머나먼 통영까지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했고, 훗날 그녀가 자신의 통영행에 동행했던 친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7월의 더운 오후라 그런지 관람객은 아무도 없다.
수령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꽃 대신 알알이 열매를 피워내고 있는 동백나무가 줄지어 우리를 반겨준다.
인적 없는 산사처럼 도심 속 호젓함을 주는 공간이다. 수학여행 철이 되면 깔깔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경내에 가득할 것이다. 장군은 오히려 그런 때를 좋아하시지 않을까. 백석의 시는 강구안 골목길에서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풍림 식당 앞 담벼락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시가 걸려 있다.
세병관은 1604년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 통제영(제1대 통제사가 이순신)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통제영 성과 관아를 지었으나 모두 스러지고 유일하게 남은 객사 건물이다. 박경리 등 이곳 출신의 예술가들이 소학교 교육을 받기도 했던 곳. 마루가 드넓은 세병관은 지금은 시민들의 쉼터로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서쪽 벼랑은 서피랑, 동쪽 벼랑은 동피랑이라 부르는데 통영 일대를 내려다보기에는 서피랑이 좋다. 동피랑은 벽화마을로 불리는데 부산 감천동과 비슷한 분위기다. 통영에서만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해저터널일 것이다. 지금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1927년 개통 당시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서 매우 경이로운 광경이었을 터. 지금은 차들의 통행은 금지되고, 사람들만 왕래하는 일상 풍경 속 하나로 스며들었다.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은 1967년 충무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주요한 교통로 구실을 했다. 충무교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바로 ‘판데목’이라 불린 곳으로 한산대첩 때 쫓기던 왜선들이 물길인 줄 알고 잘못 들어왔다가 무수히 죽임을 당한 곳이다. 일제가 이곳에 해저터널을 뚫은 이유도 왜군들이 많이 죽은 지점 위로 걸어 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충무교 건너편으로 보이는 신식 다리가 바로 통영대교이고, 이쪽 물길 일대가 통영운하이다. 길이 1420m. 너비 55m, 수심 3m에 이르는 통영운하는 부산에서 여수 간 남해 내항로(內航路)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통영대교는 특히 밤에 보는 야경이 운하의 정취와 어울려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산양에서 박경리 기념관을 둘러보고 달아 공원 가는 길에 삼덕항이 나온다. 근래 방송에 나와 뜨고 있는 욕지도 가는 선착장이다. 버스도 싣고 갈 만큼 큰 페리호가 운항되는데, 욕지도까지 1시간 10분이 걸린다고 하니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배편을 알아보니 오후 시간이라 지금 들어가면 오늘 나오기 어렵단다. 욕지도 여행을 계획한다면 미리 배 시간을 알아보고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야 할 것이다. 달아 공원 가는 길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여기서 바라보는 석양이 아름답다는데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와 그림 같은 섬만 바라보았다. 이쪽 일대를 산양 일주도로라고 부르며 차들 통행이 많고 조금 복잡해 달리기 좋은 도로는 아니다. 해안길을 따라 달리려면 반대쪽 통영대교 건너 평인노을길이라 불리는 곳이 낫다. 호젓한 길을 달리다 보면 드넓은 바다가 탁 트이게 나타나고 통영 특산물인 굴 양식하는 어촌을 지난다. 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가 싶은 순간 다시 시가지가 나타난다.
서호시장 건너편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로 가는 배를 탄다.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제승당은 누군가 ‘세 번쯤은 올만한 곳’이라 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니 한 번은 더 와야 할 것 같다. 배에서 내려 걸어가는 15분 남짓 숲과 바다가 함께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 예전 그대로 눈에 밟힌다. 장군이 긴 칼 옆에 차고 시름에 잠겼던 ‘수루’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오래전 한때 이 바다가 피로 물들여졌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 혈염산하(血染山河). 장군의 칼에 쓰인 그 차디차고 단호한 결의, 그리고 심연처럼 깊은 고독을 생각한다.
통영은 작은 도시여서 다니다 보면 지나온 곳을 또 지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는 곳 또한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윤이상 기념관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건축 공간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생각의 여운을 주는 곳이다. 독일 자택을 축소해놓은 베를린 하우스 옆에는 선생이 독일에서 82년부터 95년까지 타던 메르세데스 S300d가 전시되어 있다. 통영을 떠나며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탔다. 조금 더 먼바다의 섬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장의 식당 주인은 요즘 통영 경기가 영 시원치 않다고 말했는데 케이블카는 호황이었다. 어른 왕복 1만 1000원 티켓을 끊고 10분이면 미륵산 꼭대기에 닿는다. 고저차가 꽤 커서 아슬아슬한 기분인데 발아래 헤어핀 코너에서 루지를 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도 근사하지만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르는 것도 좋다. 거제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한산대첩의 현장이 발아래 펼쳐진다. 어느 쪽을 보아도 바다와 섬, 그리고 감탄사만 가득하다.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심정을 대변하듯 정지용의 문장이 떠억 서 있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한산섬을 중심으로 하여 한려수도 일대의 충무공 대소 전첩기를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기록해야 할만치 문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륵도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 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2박 3일 동안 통영은 흐리고 비 오고 맑았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미덕은 지칠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나는 통영의 바다는 마치 손으로 쓰다듬고 싶도록 잔잔한 물결이다. 마세라티 르반떼도 그 바다 위를 흔들림 없이 항해했다.
사진 송정남 포토그래퍼
201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