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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한설 Jan 12. 2023

Slice of Life #4 - 적막

Slice of Life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 본다.


If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will gaze back into you.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할슈타트, 오스트리아. Photo by Eric



창업을 한 이후 한 가지 소일거리가 생겼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일부러 일정을 하루 비웁니다. 그리고 여덟시반 정도에 카페에 가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커피 잔을 만지작 거리며 창밖을 내다 봅니다. 이 때 커피는 반드시 차가운 아메리카노여야 하고, 클라우드 치즈 케익같은 단 것이 한 조각 있어야 합니다.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달달구리를 혀로 굴려가며 시간을 들여 천천히 녹여 삼킵니다. 그 반대의 순서도 좋습니다.


창밖의 풍경은 주로 분주합니다. 모두들 음료를 한 잔 씩 들고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나아갑니다. 그 걸음들은 어딘가 유능한 세금 징수원을 닮아 있습니다. 오늘 하루 걷어야 할 세금이 있고, 그 세금을 체불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나는 그 체불자가 있는 곳을 알고 있고, 그곳으로 몇 시 몇 분까지 당도해 초인종을 눌러야 합니다.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앉아 달고 쓴 음식과 음료를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입으로 옮기는 저와는 대조된 그 모습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년기의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저라는 사람이 존재하더군요. 눈 앞에 놓인 탁자나 의자와 마찬가지로 저 또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첫 존재의 자각이었지만, 달라지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 관성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40년을 이 행성 위에서 배회하고 있군요.


문명의 힘은 방만했습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제도와 시스템은 마치 천라지망과도 같아서, 개인이 미처 그 안에 걸어들어온 것조차 모를 정도로 당연한 것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마치 대서양 만한 크기의 수조에서 양식되고 있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마침내 임원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일정 나이가 되면 "은퇴"라는 것을 해야 하고 "시니어"라 불리면서 마침내 다가올 마지막을 기다리게 됩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인지도 모른 채 그저 끝도 없이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목적 없이 바위를 언덕 위로 영원히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제 창업을 해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바위를 밀어 올리던 시지프스가 밀랍 날개를 달고서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이카루스로 바뀐 것밖에 없지 않냐는 의심이 고개를 듭니다.


공자께서 마음에 미혹함이 없다고 선언한 마흔이 되었지만, 여전히 저는 저의 존재를 스스로 처음 인식했던 어린 시절 그 어린 아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낭떠러지인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아갈 뿐입니다. 혹은 자유낙하 그 자체를 어쩌면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때로 제가 세상에서 동떨어져 홀로 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참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마저도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일 뿐이라는 진실의 단면을 마주하고는 몸서리 칩니다.


지난 직장을 그만두기 전 6개월 간, 저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을 했고,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는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날들의 반복이었습니다. 약속이 없는 저녁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무언가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저는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소설도 읽을 수 없고, 영화도 감상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자극이 낮은 그 몇 종류의 영상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창업 이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극적이라 할 만큼 다시 두 발로 지면을 굳게 딛고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저는 여전히 얇지만 매우 질긴 박막이 존재함을 느낍니다. 


멋진 동료들과 함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멋진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꿈에 다가갈수록 그것은 그저 현실이 되어 맥없이 빛을 잃어버리고는 합니다. 


때로 현실은, 너무도 실감과 질감이 생생히 살아있는 현실(reality)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소름이 끼칩니다. 쾅쾅대는 도시의 소음 한 가운데에서 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합니다.


이토록이나 형형한 생의 적막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눈물을 흩뿌려 가며.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 위에 남아 있겠습니다.


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뉴욕의 신비도 있고

파리의 신비도 있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못지 아니하니


우르크의 작은 운하며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이며

모를레의 강이며

캉브레의 박하사탕도 있고

태평양과 튈르리 공원의 두 분수도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도


세상의 모든 신비한 것들과 함께

여기 그냥 땅 위에 널려 있어

그토록 제가 신기한 존재란 점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옷 벗은 처녀가 감히 제 몸 못 보이듯

저의 그 신기함을 알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

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가득하고

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용병들 더불어 그득하고


사철도 있고 해도 있고

어여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습니다.


- 자크 프레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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