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계속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
호텔 복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살피며 남자는 자신의 방에 들어선다. 방안에 들어선 그는 옷을 벗으면서도 통화를 계속하며 도청 감지기로 자신의 호텔 방 이곳저곳을 탐지하기 시작한다. 그 뒤 자신의 옷들에 올려놓은 머리카락을 살피는 남자. 이때 가지런히 놓여있던 하얀색 와이셔츠 위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한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에 전화를 받은 남자는 전화기 속 상대방이 하는 명령에 따라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된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박석영(황정민), 그는 군 정보사 소령 출신의 군인으로 안기부 해외 실장 최학성(조진웅)에 의해 북핵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간첩으로 스카우트 되게 된다. 이를 위해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하게 된 박석영은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중국에서 활동 중인 북한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이성민)을 접선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몇 년의 노력 끝에 어렵게 리명운을 만나게 된 박석영은 그의 의심 속에 북한 보위부 정무택 과장(주지훈)으로부터 여러 테스트를 받게 된다. 그 뒤 테스트를 통과한 박석영은 북한 연변의 핵시설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 내 광고 촬영 및 금강산 관광 사업 등을 북에 위장 제안하게 된다. 결국 이를 승낙 받기 위해 박석영은 리명운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만나게 된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북풍이 필요했던 여당 국회의원들에 의해 이 사업이 깨질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에 박석영은 큰 결단을 하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실제 있었던 총풍 사건과 흑금성 사건을 영화화한 실화 첩보 영화였다.
영화의 주인공 박석영은 육군 3사관 출신으로 국군 정보사령부 소령 출신의 군인이다. 아마도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에 비해 진급이 힘든 3사관 학교 출신이란 학력 때문에 군 내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을 듯싶다. 그로 인해 진급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박석영은 때마침 안기부의 제안이 들어오자 군복을 벗기로 결심한 듯싶다. 그렇게 안기부 요원이 되어 간첩 활동을 하게 된 박석영은 현재는 어쩔 수없이 국가의 명령으로 인해 북한 고위 인물들과 친분을 쌓고 있지만 군 출신이다 보니 국가에 충성하면서 주적인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그는 5.18 당시 내란 음모 조작 사건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로 생각하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다. 또한 그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빨갱이 김대중이 승리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선을 앞둔 어느 날 안기부 상관인 최학성으로부터 그는 명령을 받는다. 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 북한의 도발을 부탁하는 문서를 북측에 전달하라는 명령이었다. 아마도 이때 박석영은 대한민국 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하는 안기부의 모습을 보며 가치관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석영이 여태까지 배운 가치관 대로라면 북한은 우리의 주적으로 안기부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군인 출신인 그에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사주로 5.18을 일으킨 김대중이기에 북한은 당연히 김대중을 지지해야 하는데 그 반대인 여당과 접촉하는 모습은 그를 혼란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박석영은 최학성 차장과 북한 리명운의 대화를 도청하게 되고 결국 북한 정부에 400만 달러를 주며 서해안 5도를 폭격해 달라는 안기부의 비밀회담을 엿듣게 된다. 이에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고 따르던 안기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닌 여당의 안위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박석영과 거래를 하게 된 리명운은 북한 대외경제위 처장이다. 그는 북한 내 몇 명 안되는 외화벌이 담당으로 김정일의 큰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당시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기근으로 인해 한해 300만 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로 인해 당시 북한 정권은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 동맹국가들의 도움이 절실했을 시기였다. 하지만 9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1992년 이루어진 한중 수교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마저 나빠진 시기였기에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아마도 이런 시기에 북한의 외화벌이를 담당했던 리명운에게 남한의 대북사업가 박석영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깨진 상태에서 박석영이란 존재는 북한 정권으로서도 남한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남한 군 정보사 출신이란 이력을 가진 박석영을 간첩으로 의심하면서도 리명운은 그런 박석영을 믿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을 듯싶다.
이렇듯 영화는 북한 내 북핵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 임무를 위해 리명운과 북한 관계자들을 속여야 하는 간첩 박석영과 그런 박석영을 간첩으로 의심하고 테스트하지만 그를 통해 외화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리명운의 대립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높여준다. 특히 박석영을 테스트하기 위해 남한의 군사정보를 요구하고 가짜 고려청자를 주며 이를 팔아 달라고 요구하는 리명운의 모습들은 극의 긴장감을 높여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한 박석영이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입국하는 장면에선 너무나 사실적인 북한 거리 풍경과 김정일 위원장의 별장 모습들은 극의 사실감을 높여주었다. 그로 인해 극중 박석영의 시선을 따라 마치 나 자신이 북한에 잠입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극의 긴장감을 높여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잘 몰랐던 박채서씨(박석영)의 북한 활동 부분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개인적으로는 금강산 관광 사업은 북에 소떼 1000여 마리를 몰고 넘어가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故 정주영 회장 개인의 업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를 김대중 정권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영화를 통해 이런 일들이 박채서라는 개인이 간첩 활동을 통해 목숨을 걸고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 총풍사건이 만약 실제로 이루어져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북한의 서해 5도 폭격으로 이어졌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랬다면 아마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이끄는 당시 한나라당이 승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노무현 정권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북한과의 관계도 계속 악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종전선언 준비를 통해 평화체제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들이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어찌 보면 그때의 박채서씨의 결단이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뭉클해졌다.
특히 1997년 박채서의 선택으로 인해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게 되고 총풍사건마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후 10년간 정권을 뺏겼던 보수 정권은 2008년 이명박 때 정권을 다시 찾아온다. 그 뒤 2010년 박채서를 이중간첩 혐의로 6년간 감옥에 보내는 보복을 한다. 이런 보수정권의 모습은 97년 당시 박채서의 선택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8년 판문점 소떼방북 모습
1997년 대선결과
이처럼 이 영화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대북 공작원 박채 서 씨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보니 매우 사실감 넘치고 잘 알지 못했던 97년 대선의 뒷이야기까지 알 수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 초중반엔 주인공 박석영의 시점에서 대북 공작원이 되는 과정과 북한 리명운에 접근하여 김정일 위원장까지 만나게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긴장감 넘치게 설명해주어 첩보 스릴러의 매력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영화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박석영의 첩보 활동보단 박석영과 리명운의 우정에 대한 버디 무비로 변화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는 영화 <의형제>,<공조>,<강철비>같은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흥행 공식인 남북한 남자들의 버디 무비 형식을 차용한 듯 느껴져 조금은 상업적으로 느껴져 아쉬움이 남았다.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두 남자의 버디 무비보단 전작인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혈연과 지연으로 끈질기게 살아남는 최형배의 인생 전체를 그린 것처럼 안기부에 이용당하다 처절하게 버려지고 보복 당하는 인간 박석영의 삶 전체를 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열연과 사실적인 영상,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는 극의 몰입도를 높여주어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남자의 버디 무비보단 인간 박석영의 삶 전체를 그린 전기 영화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 영화였다.
한 줄 평 : 윤종빈 감독 아직 살아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