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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Sep 05. 2019

선생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논어 수장의 번역 1


나는 지금부터 이 문장을 번역하려고 한다.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1.    子曰

중국 고전의 관용구 “OO왈曰”은 “OO가 말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따라오는 문장을 인용구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애초부터 그런 의미로 형성된 구문이다. “맹자왈 孟子曰”은 “맹자가 말하였다” 이고 “기인왈 其人曰”은 “그 사람이 말하였다”이다.


“子”는 중국 고전시대의 지식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 즉 존칭이다. 일반적으로 맹자, 순자 荀子처럼 성 姓 family name 다음에 붙여서 사용한다. ‘자’라는 호칭을 붙여서 일컫는 지식인이 매우 적은 것을 고려해 보면 이것은 상당한 존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학문적 전문성을 가진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말로 “선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적절하기도 하다. 그러니 맹자는 맹 선생, 순자는 순 선생이 된다.


다만, 현대 중국어에서는 시엔셩 先生이란 호칭이 영어의 미스터 mister 또는 Mr. 에 해당하므로,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성인 남성에게 널리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므로 의미가 다르다. 요즘 한국어에서도 성인 남성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으므로 중국과 습관을 공유하는 셈이 되었다. 그러니 ‘선생’은 이제 극존칭이 아니다. 고전에서는 이 정도의 의미로는 ‘씨 氏’를 쓰는 경우가 많다. ‘씨’는 과거에는 한국어에서도 존칭이었으나, 지금은 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호칭이 되어서 함부로 사용하기 조심스럽게 되었다. 중국 고전에서는 자신이 사숙하지 않는 지식인을 가리킬 때, 특별히 극존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예의를 갖추어 일컬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따라서 ‘OO 씨’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니 ‘자’는 매우 특별한 존칭이다. 제자백가 諸子百家는 ‘여러 선생들과 수많은 학파들’이라는 의미인데,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룬 학파의 리더 정도는 되어야 ‘자’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이 존칭을 붙여 일컫는 지식인의 다수는 그 사람의 말을 기록한 책이 있거나, 스스로 저술하여 일가를 이룬 책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법가 法家의 한비자 韓非子, 병가 兵家의 손자 孫子 등을 떠올리면 된다. 한비 선생에게는 [한비자]라는 책이 있고 손 선생에게는 [손자병법 孫子兵法]이라는 불멸의 저서가 있다.   


‘자’는 존칭인 만큼 스스로를 칭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맹자 孟子]라는 책에는 “맹자왈 孟子曰”이라는 어구가 등장하고 [장자 莊子]에도 “장자 왈 莊子曰”이란 문장이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맹자나 장자가 스스로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높여서 기록하는 일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 앞에서는 부모를 닮지 못하여 부족하다는 의미로 불초 不肖라고 칭하고, 왕은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를 덕이 모자란 사람이란 의미로 ‘寡人’이라고 칭한다. 소신 小臣, 소인 小人, 소승 小僧 이런 말들은 모두 스스로를 일컫는 호칭이다. 저자들은 자신의 책을 가리켜 졸저 拙著라고도 하고 졸론 拙論이라고도 한다. 이것으로 [논어]의 문장들 중에 공자 스스로 기록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논어]의 문장들이 공자의 언어가 아니라 공자의 언어를 들은 청자인 제자들의 기억 속에 있는 공자의 말을 기록했다는 의미이며, 또다시 그 기억을 텍스트화하는 과정에서 1인 혹은 소수의 편집인들에 의해 편집된 언어들이라는 것도 나타낸다.


이 문장에서 ‘자 子’는 이름이 병기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OO선생’이 아니라 그냥 ‘선생’이란 의미가 된다. 따라서 ‘자왈 子曰”은 그냥 ‘선생이 말하다’, 문맥상 “선생께서는 말씀하시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의구심이 생기는 부분은 그냥 ‘자 子’라고만 표기된 문장을 어째서 우리는 공자의 말로 믿어 의심치 않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인식하는 매우 오랫동안 지켜진 중국의 전통이다. [논어]가 아닌 다른 텍스트에서 그것이 [사서오경]이거나 역사책이거나 다른 책을 해설할 목적으로 작성된 주석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전 어디서 갑자기 ‘子曰’이 등장한다면 당황하지 마시라, 어디서나 이름없이 표기된 ‘자’는 공자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공자왈 孔子曰’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공자의 이름을 써서 ‘중니 왈 仲尼曰’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고전을 읽은 사람들은 공자가 실제로 대단한 선생이 전혀 아니었어도 다른 도리가 없다.  누구라도 글공부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언어적 관습을 익혀야 하니 공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비교거부 유일무이의 선생이라고 세뇌당해버린다. 아마 유럽에서 건너온 마테오 리치라도 한문 배우면서 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에 "만세사표 萬歲師表"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게 동감한 것을 보면,  나도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거기에 걸려 있는 만세사표란 현액은 공자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란 의미를 선언적으로 발산하고 있다.


공자는 그저 '자'로 일컬어지는 경우 말고도 '부자 夫子'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3인칭으로 일컬을 때에도 자주 사용하였고, 공자의 제자들과 대화한 외부인이 사용하기도 했다. 언어적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부자'는 이후 공자의 성인 '공'과 합쳐서 '공부자 孔夫子'라고 하는 완성형으로 공식적인 최고의 호칭이 만들어지는데, 서양에서 공자를 일컫는 단어인 컨퓨시우스 Confucius 는 공부자의 중국 발음인 kongfuzi와 그리스식 고유명사 접미어 -ius를 결합한 것이다. 맹자 孟子는 mengzi인데 앞의 men과 ius를 합쳐서 '멘시우스 Mencius'라고 한다.     


그러니 “자왈 子曰”의 언어적 의미 literal meaning는 “선생이 말하였다”이고, 의미는”공자가 말하였다”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자의 말을 직접 듣고 기록한 사람이니, 아마도 공자의 직계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로 공자의 언급을 인용하는 형태의 문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하던지 “선생께서 말씀하시길(가라사대) ‘OOOO OOOO’라고 하시었다”라고 하면 된다. 다만 인용된 문장이 대체로 긴 편이라 나는 개인적으로 “OO가 말하였다: ‘OOOO OOOO.’” 이런 형태를 선호하는 편이다. 좀 더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한문의 원문에는 '이렇게'가 없으나 한국어로는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까닭이다. 다수의 불경은 '여시아문 如是我聞'이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따라오는 문장들은 석가모니의 말이다.


많은 경우 불경의 저자는 석가모니의 강의를 들은 제자 중 한 사람이고, 경을 이루는 문장은 대부분 석가의 말이다. '여시아문'이란 문구에는 누구의 말을 그렇게 들었다는 것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많은 경우 제목에 "불설 佛說" 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어서, 예를 들면 [불설아미타경] 등과 같이,  석가모니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불경에서 여시아문을 번역하는 일반적인 형식은 언어 그대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이다. 여기서 '나'는 석가의 제자 중 아난다 Ānanda를 가리킨다. 석가의 모든 강의를 단어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했다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다. 아난다가 실제로 그러했는가와 관계없이 불교의 전통이 규정하는 바 불교 경전은 아난다의 입을 통해 기록된 것이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대개 믿기 어려워하지만, 불가에서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그 수많은 경전의 저자는 모두 아난다이다. 대개 누구누구가 참석해서 그 강의를 들었는지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의 [복음서]의 경우도 텍스트의 저자와 인용된 문장의 화자가 뚜렷한 편이다. 저자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저자이고 [마태복음]은 마태가 저자이다. 루가와 마가도 마찬가지이다. 저술의 목적은 예수의 행적과 말을 기록하는 것으로, 불경과도 마찬가지이며, [논어]도 이러한 면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립된 텍스트이다.


저자 혹은 청자와 화자가 명확한 성경과 불경과는 달리 [논어]에는 문장을 기록하는 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비록 '자왈'이라고 하니 공자가 말한 것을 말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누가 언제 들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안연 제12] 장의 첫 번째 단락으로 기록된 안연과의 대화는 [논어]의 문장들 중에서도 다소 수준이 높은 것이고 오로지 안연만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실제로 안연뿐이라면 그 대화는 안연이 기록하지 않은 이상 남겨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연은 요절하여 [논어]의 편집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기록에는 누가 이 대화를 들었는지 혹은 누가 들은 것을 누가 전해 듣고 기록하는 것인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동안 안연하고만 대화를 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지금 번역하려고 하는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아예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여러 제자들이 동시에 들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인 제4]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의 말을 하는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삼(제자의 이름)이여! 내가 말하는 道는 하나이나 이것으로 모든 것을 아우른다."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자리를 떠나셨다. 다른 제자들이 물었다: "무얼 말씀하시는 것인가?"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선생님의 도란 오로지 충 忠과 서 恕 일뿐입니다."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子出。門人問曰:何謂也?曾子曰:夫子之道,忠恕而已矣。[논어] 4:15)


이 단락을 보면 공자가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의 제자 하고만 대화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분명히 "삼아!"하고 증삼을 특정하여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안연12의 첫 단락은 "안연이 인 仁에 대해 물었다"로 시작하므로 여기서는 안연이 자발적으로 공자와의 대화를 단독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위의 문장에서 그려진 풍경처럼 이 자리에도 여러 제자들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또한 따라서 무리하지 않다.


증삼은 성은 '증 曾'이고 이름은 '삼 參'인데, 위의 인용문을 보면 공자는 증삼을 '삼'이라고 부르고 있고, 문장을 기록하고 있는 미상의 청자는 증삼을 증자라고 깍듯이 높여서 호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기록자는 증삼일 수 없다. 이 문장의 기록자는 증삼을 선생님으로 받드는 그의 제자들일 확률이 아주 높다.  안연은 다른 공자의 제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논어]에 '안자'라고 언급되는 일이 없다. [논어]에서 '자'를 붙여서 칭하는 경우는 증삼과 유약  有若 두 사람뿐이다. 그래서 [논어]는 전체적으로 공자의 직접 제자가 아닌 제자의 제자들, 즉 증삼과 유약의 제자들에 의해 저술되었거나 최소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증자와 유자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이 두 사람을 논어의 편집에서 아예 배제해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기록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절한 안연과 '자'가 붙어서 호칭되고 있는 증삼과 유약은 아니라고 결정할 수는 있다.


이상을 고려해서 '자왈'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이 하면 좋을 듯하다.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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