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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May 08. 2020

자장면의 명령에 따라

간헐적 단식에 도전하다

한 10 년쯤 되었을까? 맛있는 걸 먹여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지인을 광화문으로 데려가서 자장면 한 그릇씩 먹은 일이 있다. 그 집의 자장면의 소스는 대체로 평범한 수준이있지만, 첨가제를 쓰지 않은 면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었다. 21 세기의 식당 음식이 기교가 없고 질박하다는 것은 도리어 큰 가치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난 맛집 사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날의 자장면 이후 내 삶은 송두리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식사는 매번 매우 중요한 의식 같은 것이라서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최고의 음식이 선택되어야 했다. 당연히 퀄리티 식사를 하면 그만큼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고, 난 항상 음식을 남김없이 비웠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마저 비우기를 자원하기를 자주 하였다. 나는 태생적으로 장이 약하여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위는 좋은 편이어서 많이 먹어도 속이 아파 고생하는 일은 드물었다. 때때로 과식으로 인한 역류성 식도염 증세가 있었고, 몸무게가 85킬로 가까이 나갔지만, 그 정도야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고메이 미식가였으니까. 공자도 고기가 반듯하게 썰어져 있지 않으면 먹지 않은 미식가가 아니었던가? 


그날의 자장면도 미식가의 세심한 선택이기는 했다. 함께 갔던 친구도 지극히 만족스러워했다. 내 선택이 인정을 받았겠다, 고양된 기분으로 식당을 떠나려 하는데, 내 기분을 묘하게 미궁으로 밀어 넣은 것은 자장면의 가격이었다. 두 그릇에 7천 원. 1 인당 3천5백 원이다. 머쓱해진 난 돈내기를 머뭇거릴 정도였다. 그토록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겨우 그 돈을 내다니. 나는 무전취식이라도 한 듯 겸연쩍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큰 깨달음이 밀려왔다. 탁월한 퀄리티의 음식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깨달음에는 내가 오랫동안 유지했던 미식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도 포함되었다. 내 안의 단단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동시에 새롭고 가벼운 무언가가 확 열리는 듯한,  그래서 새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나의 미식 사냥은 그대로 중단되었다. 


미식을 포기한 나는 아예 단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간헐적 단식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정보를 종합하면 15시간 이상 공복 상태를 유지하면 독소를 배출시키고 소화력을 향상시키는 몸 안의 청소부인 효소의 활동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하루 한 끼가 최선이지만 아침을 거르는 것이 두 번째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석가모니가 평소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나도 도전했다. 굶었다. 공복 상태가 20시간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첫 번째 식사는 최소한 오후 2 시가 넘어야 했다. 굶다가 먹으면 곧장 다시 배가 고팠다. 오후 5 시까지 굶은 날에는 기운이 빠져 온몸이 떨리고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두어 주 지나고 나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여전하였지만 신기하게 기운이 없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자전거를 타 보았더니 괜찮았다. 배가 고프다는 느낌만으로는 신체 활동 에너지를 가늠할 수 없는 듯했다. 차차 불편한 느낌도 사라졌다. 6 개월이 지나니 몸무게가 무려 13킬로나 빠져 있었다. 과식이 없었으니 역류성 식도염은 당연히 발생하지 않았고, 신기하게 과민성 대장증후군도 완전히 사라졌다. 과거에는 배가 꽉 차있는 느낌이 일상의 상태였지만 이후에는 배가 고픈 상태가 일상이 되었다. 뱃속이 비어 있을 때에만 기분이 상쾌하고 의식이 또렷한 것이, 이제 배부르게 먹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간헐적 단식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급스러운 쾌락이었다. 군자는 절대 배불리 먹지 않는 것이라며, 공자도 사실 과식을 금지하였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도 고통을 인내한 것이 아니라 금욕이 주는 쾌락을 향유한 것이었다. 불교의 수도승들도 절제와 정지의 수련을 거듭하면서 더 행복한 삶으로 자신을 향상시킨다.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늘리고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줄이고 덜어 내는 것이라는게 노자의 가르침이다. 나는 미식의 중단과 과식의 중단을 통해 금욕적 삶의 즐거움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경하게 되었다. 풍요와 안락함 대신 부족함으로 연명하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수도승의 삶을 말이다. 그곳에는 오히려 풍요로운 도시에는 없는 천상의 쾌락이 있을 것이다. 십 년 전의 질박한 자장면에 속에 이런 가르침과 명령이 새겨져 있었을 줄이야!  


얼마 전 광화문의 어느 전통찻집 앞에서 우연히 레바논 출신의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서울의 이것저것에 관심을 보이던 그 아가씨는 내가 향하고 있던 커피숍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커피는 나만 마시게 되었다. 자기는 해가 지고 난 후에야 무언가를 먹기 시작한다고 한다. 히잡은 두르지 않았지만 날마다 라마단을 실천하는 것은 무슬림인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나처럼 뱃속이 비어 있는 낯선 중동의 무슬림 아가씨가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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