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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트 요리 May 29. 2022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내가 본 것만을 믿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길을 잃는다

오랜만에 혼자 합정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다녀왔다. 나들이 가는 김에 하루 정도는 세미나나 논문과는 관련 없는 책도 좋겠다 싶어서, 작년에 구입하고 시간 핑계로 읽지 않고 방치해두었던  책을 꺼내들었다. 지하철에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서 카페에서 커피가 나올 즈음에  읽었던  같다. 책의 논의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점심에 잠깐  읽으면서 고민해볼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됐던 것들을 메모해두려고 한다.


작고한 영국의 문화 비평가 마크 피셔(M. Fisher)의 저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Capitalist Realism)는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문화사적/정신사적 상황에 대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마크 피셔가 작금의 자본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묘사하는 개념으로, 여기서 '리얼리즘'은 실재론보다는 현실주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가 최선의 대안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임을 받아들이게 된 준-종말론적 상황을 가리킨다("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 pp. 11-2). 마크 피셔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알폰소 쿠아론)에서 묘사되는 종말론, 즉 새로운 그 무엇도 생산될 수 없는, 오래된 것의 반복만이 존재하는 문화적 상황이 바로 현재 자본주의의 멘탈리티라고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피셔가 특히 제임슨(F. Jameson)과 지젝(S. Zizek)의 입장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이들의 문장 이상으로 이러한 문화적/정신적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즉, 포스트 포드주의적(post-fordist) 자본주의는 희망(반자본주의) 조차 식민화하면서 그 바깥에 무엇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컨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거대 기업은 재앙의 원인이자 악역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상업화된 문화 영역에서 "우리 대신에 반자본주의를 상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음"을 함의한다(p. 30).


(사실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종말이 '불임'으로, 희망(기적)이 '출산'의 방식으로 체현되는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종말/기적(희망)의 이분법적인 항이 이 여성의 신체 위에서 다뤄지는 맥락을 따라가면서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설국열차'(봉준호)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요점은 '희망(기적)=출산(새로움의 생산)'이라는 도식이 너무 기계적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피셔가 이러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종말론적 상황의 문화적 증상으로 꼽는 것이 바로 정신질환과 관료주의다. 여기서는 정신질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예컨대,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자연화함으로써 자신이 역사적으로 유한한 체계임을 은폐하는데, 그 효과는 제임슨이 말하는 '시간성의 붕괴'이다. 피셔는 다음의 제임슨의 문장을 인용한다. "시간성의 붕괴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실천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모든 활동과 지향성에서 현재의 시간을 갑작스레 해방시켰다"(p. 53). 다시 말해서, 과거 반자본주의 투쟁이 자본주의를 '탈자연화'하여 역사적으로 유한한 체계임을 드러냈다면, 피셔에게 현재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그러한 역량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자연화하는 자본의 회로에 통합되었다. 자본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제 사라진 과거의 무언가와 새로운 미래의 무언가를 상상할 필요 없이 늘 동일한 것, 즉 자본주의만이 반복될 뿐이다. 이제 시간성은 붕괴하고 오직 소비를 매개로 쾌락의 순간에 머무르고자 한다("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 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우리가 지금 교실에서 대면하는 학생들은 저 무역사적이고 반기억적인 블립 문화blip culture에서 태어난 세대다. 다시 말해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들로 이미 잘려 있었다. ... 그러므로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같은 무언가가 병리 현상이라면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병리 현상이다. 즉 하이퍼미디어 소비문화의 엔터테인먼트-통제회로에 몰입한 결과다." (pp. 50-1)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피셔의 설명이 대체로 기계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피셔가 자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반자본주의적 실천을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피셔가 현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실천들이 그 자체로 이미 자본의 생산물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 이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까운 과거가 정치적 잠재성들로 가득한 타락 이전 상태였다고 상상하는 태도는 위험하며 오해를 초래할 소지가 있다. 또 20세기 내내 상품화가 문화의 생산에서 담당했던 역할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전용과 회복, 전복과 통합 사이에서 벌어졌던 옛 투쟁은 이제 끝난 듯 보인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이전에 전복적 잠재성을 지닌 듯 보였던 것들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사전구성, 즉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망,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다. 가령 '대안적' 또는 '독립적' 문화 지대들이 자리 잡고 확립되어 있는 곳을 보라. 그곳에서는 반항과 논쟁의 오랜 몸짓들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된다. '대안적' 또는 '독립적'이라는 표현은 주류 문화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류 내부의 스타일, 사실상 바로 그 지배적인 스타일이다(pp. 23-4)."


달리 말하자면, (피셔의 표현대로) 주류적인 문화 내부에는 어떠한 균열이나 모순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과 완전히 단절된 바깥에서만 대안을 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런 것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피셔가 지적하듯이 좌파들이 사실상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 빌 게이츠 같은 이들과 공모하는 것을 대안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대중문화 혹은 이데올로기 내부에 존재하는 (변혁의 계기로서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연중에 가정하는 피셔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단적으로, 피셔가 자본에 의해 사전구성된/식민화된 반자본주의적 상상력의 예시로 드는 할리우드 영화들의 경우, 그 영화들을 관람하는 대중들은 주체화의 방향이 기계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니지 않겠냐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피셔는 지나치게 보드리야르와 닮아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에서 고민/주목할 만한 다른 부분들은 이런 것 같다. 즉, 현재의 반자본주의적 실천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옛 형태의 실천이 이루어졌던 맥락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분명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 54).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종말론적 상황에 비추어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적합할지 따져 보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이미 자본주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지 않음은 분명히 동의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과거의 운동을 견인했던 '순수한 형태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노스텔지어로는 지금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어보인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미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산 소유자가 되어 자산 가치 상승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나는 좌파들이 변혁의 주체로서 순수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애도하고, 이제는 어떤 대안적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현재의 정세에 적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적 개입을 위해서 더 철저한 과학적 분석들이 요구된다고도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은 길지만, 책의 말미에 수록된 피셔와 딘의 인터뷰의 일부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딘은 이렇게 시원하게 이야기한다.


좌파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오큐파이 운동에 내재한 무정부주의 경향에서 이처럼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열려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 이런 입장들은 지금 우리가 언급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피켓을 만들고 시위를 조직하며 팸플릿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시험대는 유효한 집단적 행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일입니다. 또는 함께 할 수 있고 실제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일입니다. 다른 사례로 최근에 저는 한 활동가가 은행 업무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활동 집단의 과제를 투명하고 지속 가능하며 수익성 있고 매력적인 은행 업무 모델, 즉 소비자들이 원할 것 같은 은행 업무 모델을 찾으려는 시도로 묘사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는 책임 있는 자본주의를 원하는 그저 또 한 명의 기업가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큐파이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는 듯 말이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그의 주체성을 완전히 구조화한 나머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대안이라곤 더 나은 소비용 제품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상상력의 쇠퇴는 집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의 쇠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당신의 논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즉 자유로운 선택, 개인의 책임, 경쟁 등을 강조하는 경제적/정치적 구성이 표면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들까지 포함해 주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 보여주는 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피셔가 적합한 답을 제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자본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인 냉소주의 속에서 좌파의 급진적 상상력을 어떻게 재활성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는 매우 긴급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새로운 상상력은 과거에 대한 노스텔지어도 아닐 것이고, '무엇이든 대안적'이라는 의지주의적인 낙관론도 아닐 것이다. 이 사이에서 무엇을 떠올리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구체적 분석과 피셔의 답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던지고 있는 질문 자체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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