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는 1940년 제국주의 일본의 고베를 배경으로 ‘스파이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각본을 쓴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터뷰를 보면 이 영화는 지형 때문에 실제로는 고베에서 단 한 장면도 촬영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전후 일본의 자기반성적 자의식이 주된 영화일까, 하는 약간의 걱정을 했었는데 (걱정한 이유는 그런 내용이라면 재미 없을 것 같아서다)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그 이상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제국주의 일본이 벌였던 (소위 “마루타”라고 불리는) 생체실험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영화에 없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런 내용은 영화상으로는 극히 일부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스파이의 아내>는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의 아내”에 초점을 맞추면서 영화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고, 전시라는 역사적 배경은 이 서스펜스가 작동할 수 있는 영화상의 조건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시종일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남편 유사쿠에 대한 의심을 거둬들일 수 없는 아내 사토코에게 이입하며 도대체 남편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일지 의심하게 만든다. 사실 영화에서 남편 유사쿠의 생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불투명함 때문에 더욱 스파이의 아내에게 이입하면서 영화를 보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 내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영화 중반에 들어서 사토코가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인지 의심했던 그 일(만주에 갔다 온 일)이 사실 만주에서 자행된 생체실험 자료들을 입수해서 이를 샌프란시스코에서 폭로하려는 유사쿠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났는데도, 그 이후로도 여전히 유사쿠의 속내에 대한 의심을 거둬들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사토코는 너무 해맑게 남편과의 미국이민을 기대하지만 관객은 끝까지 유사쿠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애초에 의심이 사토코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내를 결코 “대의”의 동지로 생각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은연중에) 의심했던 유사쿠에게서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유사쿠가 사토코를 애정하는 것 같지만 끝내 대의를 숨기려 했음은 그가 아내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모르는 사토코는 해맑을 수 있겠지만 나는 관객 입장에서는 남편 유사쿠가 과련 사토코와 그대로 미국을 같이 갈까, 라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서스펜스는 무엇도 투명하게 믿을 수 없는 전시라는 역사적 현실뿐만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을 자청했던 한 남성의 오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사쿠가 “나는 국가가 아니라 인류 보편에 충성한다. 그래서 스파이가 아니야”라며 화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맞는 말인데도 진짜 재수 없었다…)
이런 지점에서, 아내 사토코가 재밌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토코는 정말 순수한 인물인데, 극이 진행되는 내내 ‘사랑밖에 난 몰라’ 같은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토코가 ‘대의에 헌신하는 남성’과 역사적 현실을 모르고 ‘개인의 행복에 골몰하는 (무지한) 여성’이라는 지루한 도식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토코가 그렇게 납작한 인물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순수하기 때문에 사토코는, 남편에게 자신만을 남기기 위해서 남편의 동지였던 사촌을 밀고해 죽이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거나, 남편과 미국에 가기 위해서 기꺼이 ‘조국 일본’의 과오를 폭로하는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하는 모습도 보인다. 개인의 욕망이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시대에, 사토코는 역사적 현실에 무지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알지만 자신의 욕망을 그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영악한 인물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사토코에게는 일본이 망하냐 그렇지 않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듯이). 그 외에 살짝 사소한 부분이지만 스파이를 적발해내는 일본 경찰이 사토코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는데 사토코가 그걸 알고 즐기면서 적당히 이용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런 면도 사토코가 마냥 헌신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두고 사라진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미군의 공습 폭격이 쏟아질 때 혼자 바다로 뛰어나가 절규하는 사토코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영화 전체에서 이 장면이 가장 좋았는데, 사토코의 절규가 단순히 남편의 죽음이 슬퍼서만은 아니고,묘하게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해내는 울음도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일본이 몰락해서 일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을 묶어 두었던 부표였던 유사쿠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에서 풀려나는 (그러니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울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마치 그것이 일본이든 남편이든 모든 게 무너져야만 그녀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게다가 바다의 모습이 진짜 세상의 끝 같아서 더 묘한 인상을 주었다.
이 외에도 <스파이의 아내>에는 다른 재미있는 요소들이 꽤 있다. 예를 들면 컷 자체가 길고 인물들이 무대 위를 활보하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아오이 유우의 연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왜 좋은 이유를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 같다. 감독과 각본의 인터뷰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면 원래 시나리오에는 결말 부분이 마치 더 내려갈 데 없는 세상의 끝/지옥 같는 순간이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새로운 자막의 추가와 함께 약간 다른 의미가 가미되었다고 했던 것 같다. 내게는 마지막 장면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