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솔직히 내가 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히 여기에 오기까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는 것, 노동 가치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 한국의 역사적 자본주의 대한 적실한 마르크스주의적/세계체계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 등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 꿈은 긴 시간의 단련이 필요한 일들이고 지금의 내 보잘 것 없는 글들과 생각들에 더욱 냉정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이 꿈을 위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사실 요새는 글도 잘 안 읽히고, 글을 읽어도 읽은 내용만 받아들일 뿐 내 생각으로 더 발전도 안 된다. 그 대신에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시험들을 통과하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글을 쓰고, 익숙한 생각들을 반복한다. 생계 때문에 늘린 일 때문에 지쳐서일까. 솔직히 이건 핑계 같다. 열정을 쏟고 싶은 관계도 다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다시는 열정을 쏟고 싶은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있지도 않은 마음으로 냉소하면 조금은 더 나아질까.
모든 게 관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냉소로 나를 지키겠다는 내 오랜 무용한 습관이 차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메기」(이옥섭, 2018)를 보면 "구덩이에 빠졌을 때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게 아니라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지금 난 구덩이를 더 파서 숨어 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집어 치우려고 한다.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나름 무언가를 하고 있기는 하다. 익숙한 생각들을 넘어서고 싶어서 존경하던 다른 학교 교수의 수업을 청강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듣기를 잘 했다는 생각 중이다. 이렇게 애써서 하나씩 더해나가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을까. 정말 마음 깊은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앞으로 내가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다. 늘 그렇듯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견디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지금 나는 구덩이를 더 파서 숨고 싶은지 벗어나고 싶은지도 헷갈린다. 지금은 여기서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야지, 라는 생각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