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디자이너는 미국에 살면서
7개월이 된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있다가 안경을 낚아채는 바람에 남편의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남편은 KP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안경 구입을 위해 진료를 예약했다.
미국에서 도수가 있는 안경은 의사의 안경 처방전(spectacle prescription)이 있어야 주문할 수 있는 처방 제품이다. 처방전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는 처방약과 같다. 시력 검사는 대개 안과의사(ophthalmologist)가 아니라 검안의사(optometrist)가 진행한다. 검안의사는 단독 클리닉이나 의사의 클리닉, 또는 안경점에서 근무하면서 전반적인 눈의 상태를 검사하고 안경과 콘택트렌즈를 위한 처방전을 제공한다. 한번 발행된 처방전은 2년 간 유효하다.
눈 검사(eye exam)와 안경에 대한 보험 커버(vision care coverage) 여부는 보험마다 다르다. 오바마케어 규정에 따라 아동의 건강보험은 vision care를 필수적으로 제공하나, 성인을 위한 건강보험에는 필수가 아니다. 다행히 우리가 가진 KP 건강보험은 매년 1회의 눈 검진 비용을 커버하고, 매년 최대 $225의 안경 비용을 커버한다. KP 보험의 지원을 받으려면 안경점 역시 KP 메디컬 센터 안의 KP 안경점을 이용해야 한다. KP는 회원이 KP 소속 시설이나 KP와 계약된 서비스 제공자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안경점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이었다면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라고 비판받았겠지만, 미국에서 KP의 안경점은 조율된 케어와 비용절감을 위해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KP가 회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운영하는 시설일 뿐이다.
사진. KP Bellevue Medical Center 내의 안경점. KP 보험의 비용 지원을 받아 안경을 주문하려면 KP 시설 내 안경점을 이용해야 한다. 시력 검사는 진료 구역 내 검사실에서 검안의사가 실시하고, 안경점은 유효한 안경 처방전을 가진 회원이 예약 후 방문할 수 있다.
안경이 부러지자마자 KP 안에서 안경을 주문할 수 있는 방법을 파악해 예약을 시도했다. 안경 처방전이 없기에 안경점 방문 이전에 검안의사의 시력검사가 필수였는데, 가장 빨리 검안의사를 만날 수 있는 날짜는 약 한 달 후였다. 같은 날 방문 때 안경을 바로 주문할 수 있도록 검안의사 검사와 안경점 방문을 연이어 예약했다.
예약 후 한참을 기다려 검안의사를 만났다. 검안의사는 전반적인 눈의 상태를 살피고 시력을 검사한 후 진료후 요약지(After Visit Summary)와 함께 안경 처방전을 건네줬다. 이어서 예약시간에 맞춰 안경점을 방문한 남편은 안경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여러 안경테들을 확인했는데,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처방전에 따른 렌즈 주문 가격은 $283, 안경테 가격은 $200대 중반에서 $380 정도로, 총 $600 정도의 비용이 예상됐다. 보험이 커버하는 비용을 제외해도 $300~400불을 지불해야 했다. 더욱이 안경 주문 시 안경을 받기까지 2~3주를 기다려야 했다. 한 달간 부러진 안경을 쓰고 살며 새 안경을 맞추는 날을 고대했던 남편은 처방전만 가지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와비파커(Warby Parker)로 갔다. 와비파커는 New York City에 기반을 둔 온라인 안경점이다. 온라인에서 안경테 5개를 선택하면 무료로 배달받아 착용해볼 수 있는 Home Try-On 서비스로 유명하다.
아이폰에 와비파커 앱을 설치한 후 실행했다. 안경테들은 랜든(Landon), 펄시(Percey), 해스켈(Haskell), 비즐리(Beasley), 롸잇(Wright)처럼 입에 딱 붙는 이름을 가지고 깔끔한 정면 뷰로 나열되어 있었다. 안경테들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드는 안경테를 선택해 각 안경테 화면에서 색깔을 고른 후 Virtual Try-On을 통해 바로 얼굴에 안경을 착용했을 때의 모습을 확인했다. 안경을 쓴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안경의 모습도 얼굴 방향에 맞춰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마음에 드는 안경테를 5개 골라 집으로 받아보는 Home Try-On을 신청했다. 토요일 오후에 신청한 안경테들이 수요일 오후에 도착했다.
화면. 와비파커 앱. 초기 화면은 남자들을 위한 Shop Men과 여자들을 위한 Shop Women으로 나뉘어 있다. 안경테들을 골라 최대 5개를 집으로 받아서 시착해볼 수 있고, 바로 주문할 수도 있다.
화면. 아이폰 X와 그 이후 모델에서 이용할 수 있는 와비파커 앱의 Virtual Try-On 이용 화면. EyeBuyDirect와 같은 다른 온라인 안경점들은 이용자가 본인의 사진을 업로드해서 안경테 착용 모습을 확인하도록 하는 것과 달리, 와비파커는 아이폰의 Face ID와 AR 기술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얼굴 모양과 방향에 맞춰 안경을 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직접 안경테를 쓰고 얼굴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타임지는 와비파커의 Virtual Try-On 기능을 2019년의 Best Inventions의 하나로 선정했다. (사진 출처: Warby Parker)
사진. 집으로 배송된 시착용 Home Try-On 안경테들
'좋은 것들이 당신을 기다립니다(Good things await you)'라고 쓰인 검은 상자를 열어보니 주문했던 5개의 안경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비슷해 보였던 안경테들을 직접 써보니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몇 번의 착용 끝에 가장 어울리는 안경테를 골랐다. 다시 와비파커 앱을 열었다. 결정한 안경테를 선택한 후 렌즈 종류와 렌즈 소재를 정하고 검안의사가 발행한 처방전 사진을 업로드한 후 결제를 마쳤다. 안경테와 렌즈 모두 다 해서 $225을 지불했다. 안경테와 기본 렌즈 비용이 $95이고, 빛에 자동 변색되는 렌즈와 압축을 추가한 가격이 각각 $100과 $30이었다. 그래도 KP를 통해 보험으로부터 일부 비용을 지원받고 안경을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했다.
동공 간 거리인 PD(Pupilary Distance) 입력도 앱에서 바로 진행했다. 다른 온라인 안경점들은 이용자들이 직접 자를 들고 거울 앞에 서서 동공 간 거리를 측정하도록 하는데, 와비파커는 앱에서 카메라를 통해 동공 간 거리를 자동으로 측정했다. 미더운 마음에 PD 측정을 3번 반복해서 2번 반복해서 나온 값을 선택했다.
안경을 주문한 후 새로운 안경이 배송되기만을 기다렸다. 주문 확인 메일을 통해 보이는 예상 도착일은 15일 후였다. 한국 안경점의 빠른 속도에 익숙한 사람의 머리에 '장난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부러진 안경테를 쓰며 버티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9일 만에 새로운 안경을 담은 파란색 상자가 집에 도착했다.
사진. 주문 후 9일 만에 도착한 안경
파란색 박스를 열고 안에 담긴 WARBY PARKER가 새겨진 검은색 상자를 여니 단정하게 생긴 검은색 안경집이 들어있었다. 안경집을 열자 완성된 NICE TO SEE YOU라는 인사말과 안경이 보였고, 그 아래에 Warby Parker in 100 Words(100 단어로 설명하는 와비파커)가 새겨진 안경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온라인으로 안경을 주문할 때에는 기술에 감동했는데 제품을 받아 든 후에는 디테일에 웃음이 났다.
사진. 와비파커 안경집과 안경 수건
핸드폰에 와비파커 앱을 설치한 후, 심심할 때면 와비파커 앱을 열고 새로운 안경테를 골라서 써보는 데 재미를 붙였다. 지난 몇 년간 잘 고른 안경테 하나에 만족하며 해마다 렌즈만 교체해서 사용해왔는데, 새로운 안경테들을 자꾸 구경하며 얼굴에 써보니 새로운 안경테에 대한 물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코로나 유행으로 대부분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패션과 관련된 쇼핑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런 때야말로 새로운 안경테는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소비라고 믿고 싶어 졌다. 미국에서 유효한 처방전이 있었다면 진작에 주문했을 것 같다. 와비파커 홈페이지에 나오는, 와비파커 안경을 쓰는 사진가, 작가, 뮤지션, 댄서, 디자이너 등의 사진을 보니 나도 와비파커 안경을 쓰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경심마저 생겼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날, 검안의사부터 만나 미국 안경 처방전을 확보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