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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mkoon Oct 21. 2024

밤을 걷는 뉴요커

어쩌다 해외살이 | 해외굿짹 61인 에 실린 글


지방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디자인의 불편한 진실을 알고 싶어 디자인 법을 배우기 위해 디자인 회사가 아닌 특허,디자인, 상표 법률 회사에 취업을 한다. 디자인 전문 변리사가 되겠다던 꿈을 키우던 나는 2006년 어느날 아침 “미국에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07년 4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찌어찌 졸업 후 1년 반동안 모은 돈으로 어학원과 한달치 임시 숙소비용, 그리고 편도행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미국 뉴욕에 왔다. 2년 정도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가야지 했는데 16년째 미국에 살고 있다. 뉴욕에서 어느정도 적응해 갈 무렵 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 다운타운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졌고 환율은 1500원을 넘어섰다. 경제악화로 회사가 문을 닫아 많은 사람들이 해고되었고,, 유학생들은 높은 환율을 이기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위해 디자인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특수 상황으로 오히려 취업비자를 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보통은 취업비자 문호가 열리는 4월에 매년 기준치보다 넘는 인원이 몰려 1주일도 안되서 지원이 마감되며, 평균 5:1정도의 경쟁률로 랜덤으로 뽑아 비자를 받는다. 나의 경우 비자가 나오는 10월 바로 전인 9월에 신청해서 한달만에 비자를 받았다. 서브프라임이라는 것도 돈이 많은 상류층에게나 해당되었던 사태이지 나처럼 단칸방에 사는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어차피 돈은 그 전에도 지금도 없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 같았고, 하는만큼 인정을 받는 그 기회가 달콤했다. 한국이었다면 주워지지 않았을 엄청난 기회와 인정이 있었기에 16년째 미국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느닷없이 타지살이의 외로움이 극도로 몰려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뉴욕의 거리를 그냥 정처없이 걸었다. 아주 오래, 

미국살이가 1년 반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그 당시 맨하탄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써클이라는 한인 클럽에 친구들과 갔다가, 그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상황 속에서 갑자기 너무나 외로운 기분이 몰려왔다. 춤 추는건 좋아했지만 술은 싫어하는 편이라 클럽이라고 해서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정말 춤만 췄어요” “취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잘 노는 사람” 이 나라서, 그런데 갑자기 허무함과 외로움이 몰려왔고 나는 혼자서 밖으로 나와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당시 클럽이 브로드웨이 41번가에 있었고 나는 퀸즈 아스토리아 36에비뉴 24st에 살고 있을 때 였다. 

지금 구글로 찍으니 걸어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나오는 거리를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클럽에 간 복장으로 여자 혼자 걸.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뉴욕의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면, 그 고요함과 적막함 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을 느껴봤기를 바란다. 

언제나 사람이 많아 시끌거리는 거리는 잠에 빠져 고요함으로 덮여있다. 내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 닿는 하이힐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고요한 거리를 걸어걸어 맨하탄에서 퀸즈로 넘어가기 위한 퀸즈보로 브릿지 앞에 도달했다. 

갑자기 친구들이 걱정할 것이 떠올랐다. 지갑도 전화기도 체크인한 가방속에 둔 채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다. 하지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그냥 집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집으로 가는 길이 더 가까울 것 이다. 어쩌다 마주친 술취한 사람이 그날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마 그들 눈에는 내가 더 무서워보였을 거다. 그당시 스모키 화장이 유행이라 눈에는 정말 검고 검은 클럽 메이크업이 되어 있었고, 위 아래로 벗은 듯 만 듯한 짧은 옷을 입고 한번 차면 극도의 치명을 입을 것 같은 전투용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한밤중에 정말 무표정으로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되려 길에 쓰러지듯 앉아 있는 노숙자가 나에게 Are you ok? 라며 묻는다. 나는 대답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노프라블럼 이라고 말하고 계속 걷는다. 걷다가 마주친 경찰이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묻지만, 나는 괜찮다며 정말 밝게 대외적인 미소와 두 손에 엄지척!으로 인사해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계속해서 걷고 또 걸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다리를 건너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또각” 또각” 또각”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가 뒤섞여 요란하게 춤을 춘다. 또각” 또각” 또각” 내 구두 박자에 맞춰 자동차 바퀴가 다리의 이음새를 지날 때 마다 덜컹” 덜컹” 덜컹” 소리가 난다. 내가 있던 클럽에 나온 비트처럼 소음은 이내 음악이 되고 나는 춤을 추듯 휘청거리며 다리를 오른다. 아치형 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사방에 트인 도시와 그 속에 홀로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날 밤하늘의 달이, 다리위에서 나에게 닿은 그 달이 그렇게 밝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자리에 무릅을 구부려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한참을 앉아 쉼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이 다리를 건너는 낯선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따뜻한 톤의 목소리로 묻는다. “Are you ok?” “ Oh, yes, I am ok. Thanks.”  “ Are you sure?” “ Yes, I am pretty sure. Don’t worry.” 그는 내가 걱정 되었는지 나를 앞질러 가는 내내 몇번이나 뒤를 되돌아 보았다. 보통은 이러면 무서워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사실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날은 그 모든 상황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의 보호를 받는듯 평온하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여름 밤이라고해도 새벽 늦은 시간에 위아래 짧고 짧은 의상을 입고 강바람이 부는 다리를 걸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정말 하나도 춥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것은 그 오랜시간 높은 굽의 힐을 신고 걸었는데도 다음날 내 다리가 멀쩡했다는 것이다. 근육통은 커녕 발 어느곳에도 물집하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앞에 잘 도착한 나는 새벽녁 거믐과 프름의 중간 쯤 되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들어가 컴퓨터로 친구들에게 나의 안녕을 알리고 편안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씩씩거리며 나의 가방과 핸드폰을 가져다 준 나의 친구에게 한시간동안 성을 내며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는 혼자였고 혼자서 외로운 밤을 걸었지만, 따뜻하고 편안했던 그 기억이, 여전히 나의 기억에 자리잡아 외로운 날이면 그날을 떠올려 타지의 삶에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미국의 삶이 그러하다고 혼자 인 듯 하지만 누군가는 너를 지키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말고 걸어가라고 나에게 알려준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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