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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 석 Jan 22. 2024

가을은 독서하기 힘든 계절이다.

패밀리 비즈니스가 있어 아침 일찍 엄마와 집을 나섰다. 날씨가 맑았다.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도로 위에 올렸다. 히터를 트니 차 안이 더운 공기로 가득 찼다. 갑갑한 마음에 창문을 내리니 차가운 바람이 내 인상을 구겼다. 나는 히터를 틀고 창문을 반만 내렸다. 내가 요즘 즐겨하는 일탈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피부를 마주하는 바람의 온도만 변했다.


세입자가 떠난 그곳은 황량했다. 아버지가 부탁한 방충망을 정리를 하고 있으니 입구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이모라고 하기엔 어리고 누나라고 하기엔 많은 한 여성과 중학생 남짓의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엄마와 나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그곳을 세세히 둘러봤다. 사정을 듣자하니 막내아들 한 명과 함께 셋이서 그곳 주변 투룸에서 사는데 애들이 크다보니 각자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학생 딸아이는 현관 오른쪽 방에 들어가 쭈뼛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모보다 어리고 누나보다 많은 그녀와 엄마가 계약에 대해 논의 했고, 엄마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다.


일정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시장이 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엄마의 엄마들이 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 흐뭇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객행위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이곳저곳을 돌았다. 도토리묵이 제철인지, 모든 엄마의 엄마가 도토리묵을 팔았다. 노란색 모자를 쓴 할머니 앞에 서서 도토리묵을 봤는데 색이 옅었다. 엄마는 그 옆의 옆의 옆의 할머니에게 색이 진하고 두께가 두툼한 도토리묵을 샀다. 도토리묵을 받아들고 왔던 방향을 다시 걷는데 노란색 모자를 쓴 할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엄마와 나는 그 앞을 지나지 않고 애써 다른 길을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추천한 양식집에 들렀다. 넓은 가게에 비해 테이블이 얼마 없었고, 젊은 여자 점원 한명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놓여있는 키오스크를 눌려 주문을 했고, 시간이 흐르자 청소기 같이 생긴 로봇이 음식을 서빙 했다. 사진을 찍어 올리면 음료수가 서비스래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기분 좋게 음식을 먹고 있으니, 앞 테이블에 앉은 중년이라고 하기엔 젊고 노인이라기엔 많은 두남자중 한 사람이 점원을 불렀다. 그는 점원에게 메뉴판에 있지 않는 것을 말하며 ‘보통 양식집에는 다 있던데 왜 여기는 없냐’고 말했다. 점원이 당황하는게 보였다. 그들의 대화가 길어졌다. 잘못한게 없는 점원이 사과를 하자 대화가 끝났다. 엄마와 나는 개의치 않고 우리 앞에 놓인 접시를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배가 불렀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많았다. 동네에 가까워지니 사람들도 많았다. 무슨 축제를 한단다.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경찰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교통을 정리했다. 차가 막히자 바둑판에 놓인 돌들처럼 희고 검은 차들이 연신 크락션을 울렸다. 엄마와 나는 식자재마트에 들려 이것저것을 샀다. 마트 한켠에서 진행하는 과일 할인행사장에 사람들이 몰려, 좋은 과일을 보느라 분주했다. 목장갑을 낀 직원이 이리저리 교통을 통제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크락션을 울리며 과일을 봤다.


집으로 돌아오니 뉴스에서 낯익은 배우가 나왔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그 배우는 굳은 표정으로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그 배우가 퇴장하자 기자들이 따라 붙으며 크락션을 울렸다. TV를 끄고 서재에 들어와 읽던 책을 펼쳤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소설 속 주인공은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돌려 이리저리 뛰었다. 애처로웠다.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책을 덮었다. 스탠드 스위치를 누르고 불을 껐다.


오늘 하루는 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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