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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은하수 Aug 19. 2022

우주의 개미구멍#1

-인지부조화의 외곽선

2017년,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 취직했다. 

 지난 10년을 아카데미에 남아 영화이론을 공부했고, 영화를 찍었고, 비평을 썼고, 알바로 영화관 알바를 했고 모 뉴스에서 영화리뷰를 썼다. 나의 미래는 유명한 영화평론가였고, 동시에 영화감독이었고 그게 힘들다면 영화제작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학과 조교를 시작했고 변두리를 서성이며 기회를 엿보던 ‘자칭 영화인’이었다. 


 정확히 앞자리가 3으로 바뀌고 지금 나는 한 출판사 책상에 앉아있다. 앞으로 출판만으로는 살기 힘들다며 새로운 먹거리를 위해 내가 필요하다는 한 회사대표의 부탁에 나는 못이기는 척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이다. 항상 문화생활을 즐기며 늘 기획 아이템을 품고 있으라는 그의 말을 들었던 나는 그의 회사가 정말 꿈에 그리던 구글이나 블리자드 같은 회사를 상상했다.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찌릿하다. 회사는 엄연히 룰이 있고 신입사원인 나는 그 룰을 따라야 했다. 다만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이 룰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인지부조화가 걸린 상태다. 출판회사에서 기획자는 출판기획자인데 그렇다면 나는 출판기획자인가. 주말 내내 읽은 아동 서적을 밀어내고 밀어내다 돈 때문에 읽었던 내게 자각은 있는가. 출판기획자들의 바구니에서 청일점인 나는 출판기획도 아니고 그렇다면 무슨 기획자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앉아 회사 캐릭터를 늘 쓰던 논문처럼 분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귀여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니고선 즐겨본 적이 없다. 딱 한번, 20년도 더 된 기억에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그릇>이 기억난다. 책이란 지식을 찌우는 영양제와 같았고 누군가의 비평문을 닳고 닳도록 뜯었으며 타인의 시집은 그 사람의 천재성에 감탄하는 자극제일 뿐이었다. 지난 30년간 출판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출판한다는 생각으로 오지도 않았고, 실제로 출판 일을 직접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무장해제 상태다.

 

 담배연기보다 못한 억지로 문화기획자라 스스로를 칭해보자. 회사까지 왕복 4시간, 하루에 20시간 밖에 가용할 수가 없고, 6시간 정도는 잠을 자야하니 14시간, 9시부터 6시까지 9시간은 회사에서 책만 읽고 분석한다. 가용시간 5시간. 쪼개면 쪼갤 수 있는 이 시간에 집을 치우고 씻어야하고 여자 친구와 통화하고 그렇게 첫 1주일을 보냈더니 내가 유일하게 즐긴 문화는 웹툰 몇 편과 오버워치, 포켓몬GO정도였다. 문화기획자가 문화를 못 즐기는 아이러니에 봉착한다.


 또 한 번 생각해보면 어디나 이렇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사회에서 창의력을 요구하는 직업은 닭장에 가둬 짜내고 짜내 인간성을 말살 시킬 때까지 애들을 혹사시킨다. 집에 들어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두 번. 거기에 비하면 나는 출퇴근이 네 시간인 게 문제일 뿐 아니겠는가. 


 “집이 멀어서 어떡해, 빨리 집구해야겠네.” 격려와 덕담으로 이 말을 듣다보면 집구하는 게 정말 쉽게 느껴진다. 세상에 4만 9천 원짜리 보증금이 있다면 말이다. 문득 두려운 게 하나 있다. 이게 익숙해져서 당연해지는 날이 오면 어쩌지. “연봉을 낮추고 출퇴근을 줄이면 안 돼?” 라고 물었다가 입사 2년차 친구는 벌써부터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쉽냐고 핀잔을 준다. 일이 싫은 게 아니야... 다만 나는 남 돈 벌어주는데 왜 나의 행복을 버려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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