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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춈푸씨 Feb 11. 2022

한국엔 길만 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머무르는 곳 


한국엔 참 길이 많다. 길을 걷는 사람도 많다. 코로나19 시국 전에는 세계적인 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한국인이 참 많다고 소문이 났다. 오래 전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한국인들과도 참 많이 마주쳤다. 지난해부터 갑자기 코로나로 인한 아웃도어 붐인 것처럼 말들이 많지만, 글쎄, 어쩌면 걷고 오르고 완주하는 것은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이런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객들은 대부분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 빠르게 완주하고 싶어하는 것. 두 번째, 한국인들끼리 같이 다녀야죠 라고 말을 거는 것. 나는 섹시한 외국인과 함께 걷…고 싶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70대의 미국인 할아버지, 역시 미국인 할머니 딸, 10살 남짓 아들과 함께 온 이탈리아 모자, 와 한국인 친구 한 명. 동행을 기준으로 나누면 다섯 그룹이 한 산티아고 패밀리가 돼 느리게 느리게 길을 걸었다. 집에서도 안 하던 효도관광을 한다고 아빠는 엄청나게 비웃었다. 


그 길에서 나는 완주를 하지 않았다. 내 예산과 일정에 비해 내 일행들의 걸음걸이는 느렸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한국인들의 유혹이 있었다. 물론 이들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혹여나 마음이 약해 (참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끔 그렇게 오해를 한다) 이들을 내치지 못하는 것일까 걱정돼 “함께 갈까요” 하는 식으로 말을 걸어주었다. 그렇게 하다간 완주는 어느 세월에 하느냐고. 그러나 더 이상 내겐 완주가 중요치 않았다. 그 길을 걸으러 간 건, 인생에서 의미를 잃고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고 천천히, 친구들과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치유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인 할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스페인 음식과 술도 마셔보고, 한국인 친구가 쥐쥐 났을 때 동네 사람 도움도 받아 보고 각자 나라얘기 말고 자기가 뭐 좋아하는지, 누가 제일 열받게 하는지 매일매일 떠들며 길을 걸었다. 그랬더니 뭐 어때? 세상엔 친구도 사람도 할 일도 많아!삶의 모양은정말 다양해! 하며 은근슬쩍 위로받게 됐다.


산티아고가 매력적인 것은, 완주가 아닌 길을 걷는 행위 자체를 의미 있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 보내는 시간, 거치며 보는 마을의 분위기…그러니까, 완주보단 길 위에 머무름이 산티아고를 세계적인 길로 만든 것이다. 70대 할아버지와 수도 없이 걸으며 대화하고, 엄마와 함께 여행 온 30대 여자 친구가 알려주는 인생 얘기를 들으며 끝도 없이 길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다시 내 삶에서 걸어갈 힘을 얻고 왔다. 


지난해 진행해본 몇 번의 나름 성공적이었던 mvp에서도 나는 ‘머무름’을 보았다. 사람들은 머무름을 찾아 우리를 왔다. 캠핑, 백패킹.. 그냥 갈 수 있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찾아왔고 행복해했다.  내가 산티아고에서 느꼈듯, 나이를 초월한 친구가 생긴다는 점에 기뻐했고 머문 공간을 사랑하게 된 후 떠났다.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 매일 싸움이 나는 캠핑장을 벗어나서 정말 자연을 즐기는 취지의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곳에서 잘 머무르고,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난 해, 우리는 유휴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소유주에 따라 어떤 형식으로 공간을 꾸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공간이 있다는 곳이면 지난해부터 수십 군데를 돌아다녔다. 강원, 경남, 울릉도까지. 그러다가 확실히 알았다. 한국에는 길만 있고 머무를 곳이 없다. 그러니 울산 울주군에서 영남알프스 완등 메달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해도 그 지역 식당에선 “톨게이트만 돈을 벌지요” 하는 말이 나오는 거다. 길만 만들고, 완주를 시키니 가장 빠른 시간내 완주하고 다시 돌아가버리니까.


지난 주 남해군을 만나서도 같은 말씀을 드렸다. 바래길이 있지만 머무를 곳이 있어야 사람들이 온다고. 관광 쪽에서는 사람들이 머물러야 돈을 쓰고, 지역에 활기가 돈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그리고 그 머무름이 질이 높은 것이어야 한다. 자연을 느끼라고 만든 길이라면, 거기서 새로운 사람과 경험을 만나고, 지역을 만나고, 그걸 통해서 사람이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가는 여행의 장소가 돼야 한다. 


매일 미궁에 빠진 것 같다가, 다시 길이 보이는 것 같다가 그렇다. 하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땐 친구가 해준 말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옳다고 생각하는 거, 하기로 한 거, 계속 떠들어야 해. 그래야 같이 할 사람이 생겨! 


거 봐, 일도 그렇고, 노는 것도, 걷는 것도, 캠핑도 그렇다. 완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성공한 길을 ‘완주 인증’만을 비결로 보는 것은 정말, 너무나, 한국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공간과서비스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함께할 분들이 생기고 있다.


봄이 오면, 조금씩 한 발 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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