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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지 Oct 01. 2020

‘보잘것’의 역설

보잘것없는 것들이 아우성칠 때가 있다

천태만상은, 어쩌면 우리네 삶은, ‘보잘것’들과 ‘보잘것없는 것’들 간 끝없는 줄다리기의 과정이자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하고 개인이 요구받는 ‘보잘것’의 기준은 나름 명확하다. 우리는 그 기준의 변형 기출로 저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보잘것’의 기준은 높고 명확한데, ‘보잘것없는 나’는 너무 다양한 데다 게릴라 복병처럼 산재해 있다. 멋진 나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다가도 금세 어딘가 모나고 부족한 나에게 머리 끄덩이를 잡히고 마는 것이다. 어떤 나는 추상적으로 잘났는데 또 다른 나는 정확하게 못났다. ‘보잘것’의 역설이다. 보잘것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보잘것없는 내가 더욱 형형해지는 태생적 괴로움과 함께 나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오늘의 나도 ‘보잘것’의 충실한 노예였다. ‘기록에 충실한 나’, ‘키치한 디자인의 노트에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하루를 정리하는 나’를 꿈꾸며 열심히 문구 잡화 사이트를 뒤져 내 가녀린 통장 속 5만 원을 노트며 필기구 따위에 불살랐다. 사놓고 쓰지 않은 방구석행 슬픈 공책들은 전혀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 없이 완벽한 도취의 흐름으로 구매 버튼까지 눌러 버린 것이다. 그렇다. 지난 스물 하고도 여러 해를 꾸준히 ‘보잘것’의 노예로 살다 보면 노예상태를 바로 깨닫지 못할 때도 있다.



보잘것없는 것들이 아우성칠 때가 있다


아,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예컨대 사방의 차창이 모두 열린,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불어 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때 그렇다. 바람에 사정없이 얼굴을 맞아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잠깐 멈출 때, 아, 나는 살아 있구나,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의 부산물은 외로움이다. 살아 있기에 인간은 외롭다. 삶에 열정적이면 열정적일수록 보잘것없는 나는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자칫 삐끗해버리는 것이 두려워지는 순간은 예정된 수순처럼 찾아온다.

어떠한 계기들로 생겨난 감정에 정신 없이 휘둘리는 것이 불안하고, 또 그 불안은 새로운 부정적인 감정을 낳는다. 이름 모를 감정들에 초연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루를 오롯이 내 의지와 결심대로 살아내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뜻밖의 하루로 살아지는 것도 인생인 것 같다. 프로답게 행동하자, 라는 결심 아래 그 동안 얼마나 속으로 앓았던가. 일상의 버거움에 여유공간이 없을 땐 적절히 수도꼭지를 열어 흘려 보내고 때에 따라서는 알맞은 방식과 정도로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거시적으로는 꼭 필요한 일인데.

그저 모자라지도 않고 너무 넘치지도 않는, 표면장력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든 더 잘해야 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이십 대 초중반의 단상에서 한층 고차원적인 삶의 자세를 생각해본다. 직업적인 면에서, 일상적인 면에서, 취미와 적성의 문제, 그리고 행복이라는 개인적인 화두를 놓고 끊임없이 스스로와 대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했구나 싶기도 하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듯,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와, 그리고 내후년의 나와는 또 사뭇 다르겠지. 뭐든 내가 가장 나일 수 있고 가장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선택과 그 귀결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보잘것 있는 내가 보잘것없는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또 보잘것없는 내가 보잘것 있는 나의 앞에 너무 초라하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이 조화로운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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