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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12. 2020

부부, 100대 명산 가는길...

부부, 한국의 100대 명산 완등을 마치다.


어깨가 찌릿하니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지막지한 통증이 왔습니다.

팔을 들어 올려 큰 원을 그려보니 ‘에구구’ 비명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추적의 모드로 버튼을 누르고 원인을 찾고자 어제의 시간으로 넘어갑니다.

납득할 만한 원인이 도무지 잡히질 않았습니다.

‘ 어젯밤, 잠을 잘 못 잤나...? 이런 일이 몇 번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통증은 없었는데... ’

‘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고...’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선배의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아마 50견일 거야. ”

“겪어봐서 아는데 " 어디서 많이 들었음직한 대답이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당분간 골프 운동을 멈추라고 합니다. 당분간이 언제 까지냐고 묻지는 못했습니다.

'다 나을 때 까지겠지....'

골프를 멈춘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작 취미라곤 술 마시는 것과 책 읽기 정도였는데 골프만큼 몰입해서 열정을 불살랐던 기억은 별로 없었습니다. 될 듯 될 듯 잘되지 않는 묘한 매력이 나를 골프 운동에 깊숙이 빠지게 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잘 다룰 듯 하지만, 막상 실행하면 까다롭고 예민한 운동이었습니다.

발전 속도는 더뎠습니다. 레슨을 받지 않고 독학이라는 자만심으로 돌고 돌아요기까지 왔습니다.

구력 10년이 넘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일까요. 아마추어 골퍼가 꿈꾸는 70대 스코어, 소위 싱글의 기록은 몇 차례 달성했습니다. 여기에 아내의 공로가 숨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내 캐디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규홀이 아닌 연습장에서 말입니다. 아내 또한 직장생활을 하는 까닭으로 주말이면 못다 한 살림과 쉼을 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고 종종 나를 따라나섰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겐 

무척 어색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서로가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듯합니다. 어딜 가거나, 새 옷을 사거나, 비록 사소한 것을 결정하려 해도 나는 아내의 의견을, 아내는 내 의견을 구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아내를 ‘집 친구’라 부릅니다.

싱글골퍼의 영광(?)은 ‘집 친구’ 덕이었습니다. ‘파3’ 골프장에서 어프로치 연습을 할 때 그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골프공을 던져줍니다. 걷기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일부러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골프채널을 붙박이로 시청했던 이유로 그녀 또한 골프 이론에 대해서는 프로급이었습니다.

프로 골퍼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 맴돌 때면 그녀가 불러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론은 당구풍월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라운딩을 하면서 부러운 모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두 부부가 함께 라운딩을 하는 장면입니다. 집 친구에게 수차례 골프를 해보라고 권유를 해보았지만, 완강하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자기는 장비를 다루는 운동은 소질이 없다면서...’

사실 아내는 무시로 걷기와 등산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뒷산 '이말산'을 넘어 차 한잔 마시자고 유혹(?)을 했지만 셈속은 1시간 남짓의 등산을 하고 싶었던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해본 우리는 그녀를 ‘산뚜벅이’ 라 불렀습니다.

평지에서는 늘 뒤처져 있는 그녀가 오르막에만 오면 나와 아이들을 제치고 앞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일요일, '회전 근거 파열'이라는 병명으로 골프 운동을 멈추고 집에서 뒹굴고 있을 때, 아내가  관악산에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갈까 말까 갈등의 번민이 주어졌습니다.

아내가 위크 포인트를 파고들었습니다. "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갔다 올게요."

" 당신 혼자서? " " 네~"

아내의 협박성 제안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4년 전, 집에서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산은 ‘관악산’이었습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갈아타지 않고 서울대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내의 성화로  북한산이 가까운 은평 뉴타운으로 이사온지 두 해 반쯤 되었습니다.

아내는 기침 알레르기가 있어 미세먼지가 있으면 즉시 반응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이사 가는 것을 아이들은 극력 반대를 했지만, '엄마의 건강이 우선'이라는 아빠의 주장에 굴복하였습니다.

서울대 정문 옆 시계탑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산꾼들을 보고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산을 탄다는 말인가...

무엇 때문에 이들은 등산을 하는 걸까? 그 이유를 찾고자 나름 생각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오름이 있고, 정상이 있고, 바위가 있다.

오르면 힘들고, 힘들면 땀이 나고, 땀을 흘린 후는 개운하고,

개운하다는 것은 술, 담배, 음식으로 찌든 독소와 찌꺼기가 빠진다는 것이며, 긴 시간을 두 발로 오르는 장거리 운동으로 숨이 헐떡거리니 폐활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다시 활력을 되찾겠지?‘

의미를 담고 그들을 바라보니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산행은 나 자신의 본모습을 여실히 알게 해 주었습니다. 외형은 건장해 보였지만 내부 엔진의 마력은 현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도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목구멍이 불타올라 가쁜 숨을 쉬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가볍게 걸음을 딛고 있는 아내에게 말도 걸 수 없을 만큼  숨 가쁜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교 시절 운동깨나 한다고 거들먹거렸던 그때의 내 모습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수치심에 앞서 자기 관리를 등한시한 자신에 대해 한심스러운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결국, 그 날의 첫 등산은 중간에서 돌아온 치욕적인 ‘위화도 회군’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본인의 체력과 현재의 몸상태가 궁금한 사람은 가볍게나마 산행을 해보기 바랍니다. 자신의 현주소를 살피는데 틀림없이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줄 것입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주말은 신이 내려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의 날이기도 합니다. 집 친구는 산뚜벅이라는 애칭에 걸맞게 주말마다 산으로 향하고자 했습니다.

주변을 보면 취미를 함께하는 부부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마는 남편의 취미에 맞춰주는 아내가 드물고, 아내의 취미에 맞춰주는 남편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경험하건대 운동에 있어서는 아내의 취향에 맞춰주는 것이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나는 아내의 취미인 등산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우린 또다시 관악산에 들렀습니다. 등산을 결심하기 전 아내에게 나의 주문 사항을 몇 가지 전달하였습니다.

내 보폭에 맞춰갈 것이며,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충분히 쉬어가 달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마의 장벽으로 간주된 연주암으로 오르는 깔딱 고개(첫 산행에서 위화도 회군을 했던 곳입니다.)에서 극한의 고통을 느꼈지만 보폭을 작게, 그리고 쉬고 또 쉬며 마침내 연주암에 올랐습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연주암에서 보시하는 공양은 꿀맛이었고, 연주대에 올라 감개무량한 첫 정상 인증숏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은 스스로 한 가지를 해낸 이후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파주 감악산에 올랐으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에도 주말마다 올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어느 산을 가야 할지 정하기 위해 인터넷을 서핑하다 뜻하지 않은 문구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2002년 세계 산의 해 기념 산림청 선정 ‘ 한국의 100대 명산 ’이라는 카테고리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니 100대 명산의 소재지가 전국으로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이 확장되었습니다. 100 명산을 등반하게 되면 전국 유람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일부러라도 여행을 해야 할 텐데 등반과 동시에 여행을 겸한다는 것은 효율과 효과면에 있어서 틀림없는 일석이조의 겸사겸사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약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내에게  설득의 논리를 폈습니다. 아내는 지나치리 만큼 쿨했습니다. “ 난 괜찮은데 할 수 있겠어요? ”  

 ‘전국 유람’으로 시작된 100 명산 탐방의 여정은 말처럼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둘 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주말 특히 토요일에 최대한의 시간을 뽑아내야 했습니다. 새벽 이동과 아침 산행이 해법으로 다가왔습니다. 중부 지역까지는 토요일 당일 산행과 간단한 명소 탐방 그리고 맛집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 100대 명산 가는 길 ’이라는 블로그를 개설했습니다. 부제는 ‘함께 가요’였습니다.

함께 가요는 내가 아내에게 부르는 소립니다. 늘 아내가 선도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은 당일에 생생한 날 것으로 차곡차곡 채워졌습니다.

100좌 울릉도 성인봉을 완등 하기까지 어언 4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마음껏 즐겼고, 몇 차례 험난한 고비도 넘겼으며, 극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었습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 결국 해냈다’라는 뭉클함과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우리를 웃음 짓게 합니다.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는 말은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아내가 함께 하지 않았다면 100대 명산 완등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 글은 ‘ 부부, 100대 명산 산행기 ’라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산이 말없이 던져주는 의미와 느낌을 삶에 맞춰 보고 싶었습니다. 교훈도 지혜도 들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함께하는 사람과 울고 웃고 부대끼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가장 정직한 사랑이라는 확신입니다.

부부라는 낱말은 같은 글자가 번복됩니다. 그래서 일심동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삶은 부부고, 부부가 삶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부부화 만사성'입니다.

점차 무감해지고 있는 오늘날 많은 부부들에게 조금이나마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량도 지리망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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