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가 나오는 만화들은 그저 싸움질만 하고 주변을 다 때려 부수며 악당을 응징하는 내용 일색인 것 같아도,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변화를 겪어왔다.
매주 쏟아져 나오는 코믹스들이 다 비슷비슷한 뻔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금방 질리지 않을까? 슈퍼맨의 인기가 급락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매주 또는 이 주에 한 번씩 나오는 연재 형식은 출판사의 입장에서 당시의 유행과 독자의 반응을 빨리 캐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되었다.
슈퍼맨이나 캡틴 마블(DC의 캡틴 마블, 현 샤잠)처럼 압도적인 능력으로 일반 범죄자들을 때려잡는 방식이 초창기 슈퍼히어로 스타일이었다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40년대에는 전쟁영웅이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캡틴 아메리카가 대표적으로, 그가 히틀러에게 주먹을 날리는 표지는 아주 유명하다(본편엔 그런 내용은 없었다).
50년대에는 공포물이 유행하면서 슈퍼히어로의 인기가 한풀 꺾였는데, 60년대에 들어서 실버 에이지라고 하는 제2의 전성기가 일어났다. 선두주자인 DC 코믹스는 그동안 본인의 시리즈를 갖고 있던 슈퍼히어로들을 한데 모아 ‘저스티스 리그’라는 팀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는 세계관인 ‘유니버스’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각기 따로 놀던 히어로와 빌런,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은 이제 모두 똑같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게 된 것으로, 배트맨의 이야기에서 죽은 인물은 다른 작품에서도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더 이상은 등장할 수가 없었다.
라이벌인 마블 코믹스에서는 1963년이 돼서야 판타스틱 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슈퍼히어로물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공통된 세계관인 마블 유니버스가 만들어졌지만 이들은 캐릭터의 성격 묘사에 많이 집중했다.
늘 용감하고 씩씩한 상태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힘과 행동에 두려워하고 실수하는 슈퍼히어로들이 대다수였다. 자산 활용의 차원에서 캡틴 아메리카나 네이머처럼 과거에 만들어졌던 캐릭터들도 다시 돌아와 합류했고, 저스티스 리그의 성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어벤저스를 만들었다.
유니버스의 탄생은 더욱 안정적이고 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더 이상 한 종류의 책만을 봐선 완전한 이해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언맨의 모든 활약과 상황을 파악하려면 어벤저스 시리즈도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슈퍼히어로 코믹스는 높은 인기(와 판매고)를 얻었고, 베트남 전쟁과 히피 문화 등의 영향으로 팝아트나 신비주처럼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분야의 요소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가 탄생하게 된 것은 시대의 부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의 검열(코믹스 코드라고 부른다)과 컬러 TV의 보급으로 인해 만화산업 전체가 침체기에 빠졌다. 대신 린다 카터 주연의 원더우먼 드라마 시리즈와 빌 빅스비 주연의 헐크 드라마 시리즈,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 영화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코믹스의 침체를 만회할 수 있었다.
출판사들은 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코믹스의 가치를 높여 인식을 개선하고 수익을 올리려는 시도로, ‘그래픽노블’이란 타이틀로 보다 수준 높은 이야기와 그림에 집중하는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기존 공식을 거부하고 슈퍼히어로들이 오히려 문제를 만들거나 아예 히어로들을 망가뜨리기까지 하는, 정석을 비튼 방식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슈퍼히어로들은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진화할 수 있었는데,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나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스> 등은 성인층에서 각광을 받고 언론에서도 주목할 정도의 파급력을 낳으며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한참 뒤의 작품이지만 2006년에 마블에서 나온 마크 밀러의 <시빌 워> 역시 80년대의 그래픽노블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뒤집었다. 모든 초인은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도록 하는 법을 두고 선악을 떠나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인 것이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히어로들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신선한 발상이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안전이 우선이라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슈퍼히어로는 9.11 테러를 겪은 미국 국민들에게 더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슈퍼히어로물은 우리의 현실과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