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DC 코믹스는 '뉴 52'라는 타이틀로 전체 유니버스를 리부트 하면서 여성 작가의 비율을 1%로 줄였다. 그 전이라고 많지도 않았다. 고작 10% 정도 더 많았을 뿐.
이런 현상에 대해 평론가와 독자들이 비판을 가하자, DC 코믹스의 공동 발행인 댄 디디오는 ‘그럼 우리가 누구를 고용해야 하느냐’며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취지로 강하게 반박했다. 거센 반발이 이어지자 결국 DC는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작가를 고용하겠다고 공식입장을 내야 했다.
마블 코믹스 역시 여성 작가의 대우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2016년 여성 작가인 첼시 케인의 글과 케이트 님지크의 그림으로 연재되던 <모킹버드> 시리즈는 단지 8개의 이슈만을 발행하고 연재가 종료되었다.
첼시 케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판매량이 저조한 탓에 연재 종료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첼시 케인이 보여준 페미니즘적인 면모에 시리즈를 취소하라는 악플러들의 요구가 빗발치면서, 마블은 첼시가 남편 마크 모한과 함께 작업하고 있던 차기작 <비전> 시리즈까지 포기해버렸다. <비전>은 이미 출간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얼마 전인 2019년에도 역사적인 <마블 코믹스>의 1000번째 이슈를 출간하면서 백 명이 훨씬 넘는 작가들을 고용했는데, 그중 여성 작가는 한 손에 꼽을 정도만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여성 작가의 비율이 월등히 낮은 이유는 슈퍼히어로 코믹스 장르가 남성 중심의 문화(그것도 백인 남성)로 여겨질 정도로 남초 장르였기 때문이다. 글, 그림, 식자, 편집 등 코믹스의 여러 제작 분야에서 남성들이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슈퍼히어로 역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이야기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내가 ‘남초 장르였’다고 표현한 이유는 최근 몇 년 새에 여성 독자들의 비율이 상당히 늘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율은 아리 어렵지만 이제 여성 독자의 눈을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이다.
좋든 싫든 코믹스도 상업적 이유로 다양성의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화 덕분에 슈퍼히어로는 세계적으로 팔리는 소재가 되어버렸다. 세계화와 다양성을 적극 받아들일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각 회사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앞 다투어 여성과 성소수자, 유색인종을 내세운 캐릭터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앞서 소개한 사례들은 모순적인 행태라 할 수 있다.
두 거대 출판사는 기존 캐릭터 중 다양성에 적합한 캐릭터의 비중을 높이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며, 기존의 역할을 다양성 캐릭터에게로 옮기는 등의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흑인인 사이보그가 저스티스 리그 원년 멤버가 되고, 미즈 마블이라는 무슬림 청소년 히어로가 탄생하는 식이다. 미국의 상징인 캡틴 아메리카는 흑인인 팔콘이 이어받고, 토르의 연인 역할에 불과하던 제인 포스터가 새로운 토르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계 소년인 아마데우스 조는 새로운 헐크로 변신했다.
또한 거대한 시장인 중국을 의식해서 중국에서 활약하는 슈퍼히어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DC는 중국판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고, 마블은 아예 중국의 출판사와의 협업을 통해 중국의 히어로 코믹스 시리즈를 선보였다.
캐릭터에 다양성이 더해지니 자연스레 서사 역시 다채로워졌다. 이런 변화들은 영상화하기 좋은 요소가 되었다.
물론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다양성만을 내세운 작품은 역효과가 났다. 북미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레드 울프>처럼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초라한 성적을 거둔 작품들은 예정보다 일찍 연재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