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핀으로 묶는다. 방 안을 채운 습기에 몸은 나른하고 정신은 가수면 상태인 듯 멍하다. 발 아래에서 자고 있던 보니는 작은 인기척에도 머리를 든다. 나는 보니의 정수리 세로 주름을 만져주고 밥그릇에 사료를 부은 다음,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선다. 차의 시동을 건 지 5분 후에 안산공원 주차장에 도착한다.
⠀
인근에 중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있다. 월요일은 자연사박물관도 휴관이라 평소보다 더 고요한 분위기다. 주차장 근처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알은체하던 두 소년은 방학을 맞아 함께 피시방에 가거나 시내를 쏘다닐 것이다.
문득 방학이면 부산 외갓집에 보내졌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며 잔병치레하던 남동생 챙기기도 벅찼던 걸까. 방학이 되면 나는 늘 이모들과 보냈다. 그때 만난 동네 아이들은 전라도에서 온 내 억양이 덜하다는 이유로 나를 ‘서울 아이’라고 부르며 내 말투를 따라했다. 밤늦은 시각이면 우리는 다른 집 창문 앞에 서서 서로만의 암호를 대며 불러내곤 했다.(당시엔 휴대폰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기에 뜯기면서 함께 놀았다. 아이들이 다른 일정이 있으면 나는 근처 만화방에 자리를 잡고 해가 질 때까지 만화책을 읽다 돌아왔다.
⠀
주차장을 나오니 공원 초입에 요구르트 아주머니의 카트가 보인다. 아주머니는 전동카트를 대놓고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있다. 지나가던 아이 엄마가 카트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흰 우유를 달라고 한다. 아주머니가 카트 냉장고의 문을 열자, 곁에 서 있던 꼬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찬이 엄마, 어제 503호 할머니 봤어요? 문에 걸어놓은 요구르트가 그대로 있던데...”
“저도 할머니를 며칠 못 봤는데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꼬마 아이는 엄마가 들려준 빨대 꽂힌 흰 우유를 연신 빨아대고 있다. 볼이 쏙 팰 정도로 쪼옥쪼옥.
⠀
나는 둘레길을 따라 올라간다. 여름의 연둣빛은 나무들을 타고 다니며 진해졌다가 연해진다.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던 할머니와 딸인 듯 보이는 중년 여성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의 시선은 초점이 없고, 딸은 그런 어머니의 정신을 붙들려는 듯 손으로 노인의 왼손을 꽉 부여잡고 있다.
어느 여름의 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는 각자의 여름을 살아내고 있다.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다른 분과 나눈 대화는 실제로는 들리지 않았어요. 이 부분은 뉴스에서 본 기사를 참고하여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