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결심
몇 년간 방치해 두었던 머리를 어떻게 좀 해보고자 아주 굳은 결심을 했다.
누군가는 매주 가기도, 가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는 미용실을
이토록 '굳은 결심'정도나 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 시각적으로 밝은 조명을 경계하는 사람이라 미용실 특유의 사방에 배치된 거울 속에 내가 보이는 게 - 움직이면 수많은 내가 또 움직이는 그러한 느낌이 - 그 움직이는 나를 쳐다보는 타인이 일렬로 앉아있는 것이 어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2. 평소에도 거울을 잘 보지 않는 난 필터 없이 정직한(평소에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모습을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3. 무엇보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그 상대에게 나의 은밀한 곳(두피)까지 까보이는 것이 뭔가 들켜버린 느낌이랄까. 평소에 샴푸를 잘 안 하시는군요. 이렇게 두피를 방치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머리가 너무 푸석해요. 등 머리 하나로 나의 생활을 꿰뚫어 볼 것 같다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상이 더해진다.
4. 머리를 하는 동안 1:1의 관계가 있다 보니 상대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나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강제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더 고백하자면, 이런저런 이유로 미용실을 외면하다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정말 고무줄을 묶고 그만큼 잘라내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잘랐을 때 결국 듣게 된 핀잔 + 안타까움이 더해져 더욱더 참담해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붙임성이 없는 본체에 머릿속에서 상대를 부풀리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술이 더해졌고, 움츠러들기만 하는 나와 타인 사이에 '공적인 거리'란 것이 사라지기에 불안해지기 때문이랄까. 그래서 내게 미용실은 몇 년간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그나마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여하튼 9월이 된 첫날,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은 머리로 나는 오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미용실을 갔다 왔다. 가기 전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뭐라고 하지, 뭐 하지 생각하다 펌을 해야 하니 그 시간 동안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 책 한 권도 챙겼다.
다행히 거울이 적고 다른 손님이 없는 예약제 1인 미용실이라 부담이 덜했다.
사장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다행히도 선을 넘는 관심과 질문은 없었다.
무엇보다 미용일을 다른 이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3, 4배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장님은 본인의 실력에 꽤 자신감이 있었고 즐기는 모습에 신뢰가 갔다.
여러모로 앞으로 쭉 갈 수 있을만한 곳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
사람들이 이래서 미용실을 사랑방처럼 쓰는 것인가! 깨달음을 얻었다.
다만 그 만족한 얼굴에 들어올 때와 너무 달라진 나의 모습이 어색해 몸 둘 바를 모르는 내가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몰라 굉장히 송구스러웠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여전히 어려운 미용실 가기.
글을 써보고 나니 조건을 충족시켜 줘야 죽지 않는 까다로운 변온동물 같은 생물이 있나 싶다만...
그게 나인 걸 어쩌겠나 싶기도 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창에 비친 나를 보니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다.
다들 미용실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