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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May 25. 2020

책임감의 척도는 결국 돈인 걸까요

노쇼(No show) 고객을 만난 순간

6년 차 호텔리어에서 유럽을 방랑하는 백수를 거쳐, 내 인생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공방 주인이 되었다. 말이 거창하게 공방이지, 원룸 사무실을 소소하게 꾸미고 자신만의 향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향의 세계를 알려주고 직접 만든 향수를 가지고 갈 수 있게 하는 향기 가득한 작은 공간이다.

한 가지 직무만 기막히게 처리하면 완료인 회사 생활과는 달리 모든 것을 스스로 다 해결해야 하는 이제 만 3년 차 1인 기업인이라 아직 서툰 점이 많다. 공방은 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수업으로 수익이 나는데 다행히도 내가 공방을 오픈할 시기에 취미 플랫폼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해 모객을 하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과외 알바로 다져진 가르치는 스킬과 웬만한 진상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뼛속까지 ‘을’인 전직 호텔리어 마인드는 클래스를 진행하는 것도, 처음 보는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도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나를 가장 고민스럽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은 대면 고객이 아닌 바로 노쇼(No show) 고객이다.

공방 클래스의 절차라 한다면, 문의 또는 예약-> 결제-> 예약 확정-> 클래스 진행 순이다. 플랫폼을 통할 경우, 플랫폼에서 미리 결제가 되기 때문에 대부분이 약속된 일정,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고 온다. 취소나 일정을 미루는 법도 극히 드물다. 하지만 동일한 절차에 결제 방식만 계좌 이체인 개인 SNS를 통해 예약을 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잡음이 많다. 아무 연락 없이 수업 시간 지각은 기본이요 심지어 한 시간 지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보한다던지, 수업 커리큘럼이 아닌 다른 것을 요청한다던지, 서비스 명목으로 뭘 더 달라고 요구한다던지, 결제를 수업 후에 해도 되냐던지. 워낙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했고, 고객의 요구에 맞춰 일을 진행하던 것이 전 직장의 업무였기에 처음엔 친절하게 다 Ok를 했다. 내 강점은 친절함이니까, 내 회사는 고객 중심이니까. 과도한 친절이 독이 될 리 만무하겠지만, 평범함 밖의 요구는 들어줘도 불만족이 나왔고, 수업에 와서 후결제를 하겠단 사람들은 모두 연락두절 노쇼였다. 약속된 수업 시간이 다 되어서 못 오겠다고 연락이 오는 건 그나마 ‘개념 있는’ 고객이었다. 노쇼로 뒤통수를 몇 번 맞고 나니 좀 더 체계적인 룰이 필요했다. 방문 결제를 원하는 사람에 한해 10%의 계약금을 선입금을 받아야만 예약이 확정되는 것으로 변경했으나, 금액이 크지 않다 보니 이마저도 예약일 당일까지 안 보내는 사람이 많았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환불을 요청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당일 취소는 계약금 환불이 불가하다는 안내를 미리 했지만 만원이 안 되는 금액으로 왈가왈부하기 싫어 늘 환불을 해줬다. 클래스 준비에 소요된 시간과 예약된 시간에 대한 나의 노동력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 이후부터는 수업료 전액을 예약 순간 미리 받는 것으로 시스템을 변화했다. 수업료는 미리 받고 나니 예약을 변경, 취소하는 일은 있어도 노쇼를 하는 일은 없어졌고 내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전. 코로나로 공방을 쉬엄쉬엄한지 벌써 3개월째. 예약이 작년 같은 달에 비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어 예약이 들어오면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고 즐거운데, 노쇼 고객이 있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예약금을 안 받은 탓이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 모레가 남자친구 생일인데 특별한 선물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왔다. 늘 그랬듯 선결제 공지를 안내했더니 인터넷 뱅킹을 하지 않는다며 내일 아침 은행에 가서 입금을 한 후 예약한 시간에 찾아가겠다 했다. 일기예보상 다음 날 오후까지 날씨가 궂었기에, 날씨가 좋지 않으니 번거롭게 그러지 마시고 공방에 오셨을 때 결제를 하시라고 오랜만에 오지랖 넓은 안내를 했다. 남자친구 생일 선물로 직접 향수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참 예쁘지 않은가. 공방에 그런 손님들이 자주 오지만 향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시향하고 고민하며 만드는 모습이 항상 예쁘게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수업료는 물론 이름과 연락처 또한 받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약속한 시간, 그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간 10분 후 연락을 해봤지만 받지 않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방문도 없었다.


약속에 대한 보증은 늘 금전이 포함되어야 가능한 걸까. 계약금을 받지 않으면 그만큼의 책임감도 없는 걸까. 왜 약속에 대한 믿음이 스스로의 책임감이 아니라 돈이 돼야 그 책임감이 생기는 걸까.


취소하겠다 또는 사정이 생겼다는 문장 하나 보내는 게 그리 어려웠던 걸까. 어떠한 이유도 모른 채 연락두절이 되어버린 그녀는 어떤 선물로 남자친구와 기쁜 생일날을 보냈을까.

호텔에서 일을 했기에, 그리고 현재 나의 시간을 상품으로 예약을 잡기에 예약의 중요성과 노쇼의 허무함을 더 잘 알고 있다. 유명 셰프들이 언론에 나와 노쇼에 대한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향수 준비물이야 오늘 못 쓰면 다음 수업에 쓰면 되지만 오늘이 아니면 버려야 하는 식재료를 쓰는 레스토랑의 경우 재료비에 대한 손해는 누구에게 청구하여야 하는가. 우리나라도 점점 예약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기에 유명한 곳을 방문할 땐 예약을 하는 것이 필수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취소에 대한 개념은 아직 갈 길이 먼 듯싶다. 내게는 노쇼 고객이야말로 가장 진상인 고객이다.


준비물은 다시 제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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