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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yr Aug 08. 2020

D의 비밀.1

- 누구나 바보같은 선택을 고수할 때가 있다

나는 서울을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태어난 곳, 자란 곳, 심지어 잠시 이탈했다가 돌아온 곳까지 모두 서울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잊지 못할 도시들이 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 있는 기차역들, 그 중 천안아산역. 지방에서 근무하는 그는 가끔 서울에 못 올라오던 적이 있었다. 


항상 본인이 감내할만한 불편함과 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의 경계 사이에서 행동하던 그가 딱 한 번 다 내려놓은 듯한 어리광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한 주말을 앞둔 어느 수요일, 본인과 나의 도시 사이에 있는 그 어딘가에서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냐는 제안을 해왔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보는 것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에, '밀당'의 역학에서 내가 밀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제안의 짜릿함은 내 위치를 정상적인 연애의 단계로 몰았었나보다. 우선 문자를 읽고, 한창 쓰던 보고서에 더 이상 집중할 수 가 없었다. 문자를 읽고 한참을 답하지 않았다. "내가 보고싶다고 하면?" 이라고 보내자마자 1이 없어지는 데서 그의 안절부절함이 전해져왔다. "보고싶어요" 라는 말 한마디에 7일 내내 마음 속에 품었던 많지만 같은 맥락의 의문점들을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아마 누군가 나를 정말 사랑하거나, 혹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는 객관적인 제3자의 시야를 가진 사람이라해도 두 사람 모두 다 나를 말렸을 것이다. 그만둬, 불분명하잖아. 그는 6개월이 넘도록 너의 손 한번 잡으려 하지 않는데, 너는 그 사람을 왜 만나는거야? 남자는 그런 동물이 아니야. 눈빛으로 충분하다고? 그와 마주보고 앉아서 밥먹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는 의미가 있다고? 세상에! 


33살의 내가 그 당시의 30살의 나의 기분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면, 특별히 그 사람이라기보다 지루한 5일간의 일상 끝에 한 주의 꿀같은 토요일이 되면 누군가와 반드시 성사될 만남이 예정되어 있고, 그 시간까지 기다리며 어떤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들이 행복했던 것 같다. 그 때의 내가 "바보는" 아니었다는 우기고 싶은 내 자존심의 방어선이자 변명일지도 모른다. 수 많은 만남들과 실망들 사이에서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가 당시의 그런 나의 희망이었다. 30살의 패닉은 내게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에게도 그런 시기였고, 나도 모르는 나의 조바심이 시작되고 있었던 그 때, 운나쁘게 그를 만난 것이다. 


천안아산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보령으로 넘어가면서 눈이 오기 시작했다. 서울에 살면서 본 적 없었던 눈이 새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정말 모든 우주의 현상들이 내가 꿈에서 깨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얀 눈을 제끼고 그를 만나러 가고 있으며, 그는 내게 잘 오고 있냐고 몇 번을 확인하였다.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 눈 밭에 내려서 그의 차를 기다리면서 난 기대했다. 최소한의 포옹, 그 동안 미뤄왔었던 서로의 손을 잡는 순간... 


하지만 그의 차에 탔을 때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 서울 주말에 만난 그 시점의 그 감정선 그대로였다. 오히려 장소가 더 이질적이어서 감정선이 더욱 어긋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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