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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야민의 안경 Oct 13. 2023

망각된 자살자? 망각된 희생자?

뒤르켐의 아노미 자살이란 무엇인가? 뒤르켐의 근대적 자살 신유형 탐사.


18-19세기 유럽, 인간의 세상 위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자살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노미성 자살.


표지-<자살>, 에밀 뒤르켐(저), 변광배(역), 세창출판사(2021)

사회학자인 뒤르켐에 따르면, 세상에는 그 전까지 자아 중심적 자살자(세창출판사 역본 에서는 이기적 자살자) 그리고 타아 중심적 자살자(이타적 자살자)가 존재했다고 보고되었다. 전자는 개인 스스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율을 견디지 못함을 자각하고 그 집단과 결별한다. 자아 중심적 자살자는 세상에 작별을 고함으로써 항자로서 자기 본심(本心)을 드러낸다. 후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나 이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집단의 규율을 위해서 본인의 육체 기능을 정지시킨다. 그는 자신의 신체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까지 그 집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본심 드러낸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기 삶을 끝낸 그 삶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 혹은 세상에 대해 선택을 내린다.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그의 흔적을 추적하며 자아 중심적 자살자 였는지 타아 중심적 자살자 였는지 판단해왔다. 즉 두 유형의 자살 현상에서 자살자의 본심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를 대표할 어떤 상도 드러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자살 현상이 나타난다. 아노미성 자살이다. 아노미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끌어다 온 단어다. 'anomie'의 'a'는 '~없이' 를 의미하는 접두사다. 그리고 'nomie'는 법칙과 규제 혹은 울타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anomie'란, 법칙 없음, 규제 없음, 혹은 울타리 없음을 의미할 수 있다. 뒤르켐은 아노미성 자살이라는 명칭을 새로운 현상에 이름 붙인다. 그에 따르면, 이 새로운 유형의 자살 현상은 전통적 자살 유형 둘, 즉 자아 중심적 자살과 타아 중심적 자살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유형에서 자살자는 어떠한 집단에 속 하였고 그 집단에서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어떤 자살자가 나타났을 때, 그가 어느 집단에 소속 되었는지 그래서 그의 좌절한 순간이 언제였을지 특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가 자살을 결심한 순간을 특정지음으로써 그의 본심을 다른 사람들이 유추하고 그의 죽음에 대해 판단하여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18-19세기 유럽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집단도 사람들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타고난 신분이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강제에서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노미 자살 현상의 경우 자살자의 본심을 추적하기 위해 특정시킬 수 있는 집단이 사라졌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에 의해 보고되는 자살자의 좌절 순간이 포착되지 않았다. 아노미 자살 현상에서 자살한 사람의 본심은 그의 신체가 사라짐으로써 망각되었다. 오직 그것 만이 아노미 자살 현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모든 것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8-19세기 유럽 사람들은 혁명을 맞이하고 자신의 넓어진 선택권을 가지고 여러 새로운 성공 사례를 늘려갔다. 어떤 이는 자본가로 성공하고 어떤 이들은 문인으로서 성공한다. 이런 성공 사례들이 가능했던 일차적 이유는 사람들이 이제 타고난 신분에서 해방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태어났을 때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특수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성공한 자본가들이나 문인들을 통해 확인한다. 아노미 현상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근대인은 어떤 규제도 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욕구하는 무엇이든 상상한다. 이런 상상을 따라 그는 자신의 삶의 '성공'을 실현하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어느 때건 이런 상상은 교체될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왜냐하면 본인은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은 자신이 욕구한 무엇이든 가능한 형식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에, 언제든 새로운 방식의 욕구가 나타나면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 남는다. 규제없는 욕구의 발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 지점과 혹은 실현될 수 없는 목표 지점 설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운이 좋지 않아 자기 목표 지점에 도저히 도달될 수 없을 거라 여기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규제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규제도 하지 못한채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좌절되는 삶을 반복한다. 이런 반복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어떤 집단 속에서도 속하지 못한채 성공에 대해 기대하는 일과 실패에 대해 좌절하는 일을 반복하다 견디지 못할 때 자살하는 것이다. 


  아노미 자살 현상은 개인의 비극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노미 자살 현상을 통해 특징지어진 자살자 개인이 어떤 집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고통에 의해 어떤 고통의 순간에 의해 좌절하였는지 아무도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살한 개인의 존재감은 망각될 뿐이다. 그는 단지 통계청에서 지시한 하나의 케이스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이 죽었다. 자살자 수 1 이 오른다. 그는 단지 숫자로 변하여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기념할 수 없게된다. 그가 남긴 흔적에 의존하여 감지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노미 자살 현상은 공동체의 비극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념되지도 심지어 기억조차 되지 않는 사건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그 공동체는 그가 자살하기 까지의 궤적을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 현상을 규정하여 어느 사회의 문제점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이 안겨질 수 있다. 


  익명적 현상인 아노미 자살은 여러 공동체의 연쇄인 인류에 있어 크나큰 비극이다. 인류의 관점에서 공동체의 관점에서 포착되지 않은 현상이 반복되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남겨두는 일은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을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잠복되어있는 문제는 인류의 골치거리인 것이다. 인류는 과연 잠복된 적을 이제까지 그대로 남겨두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에서 뒤르켐은 신분제가 없어진 그의 시대에 개인들이 자신이 속한 직업의 집단과 그 집단의 규율을 중심으로 스스로의 본심을 드러내는 즉 정치적 입장을 구체화할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주장한다. 아노미 자살 현상은 인류의 관점에서 볼 때 골치아픈 문제다. 인류는 아노미 자살로 사라진 개인을 기념할 수 없다. 사라진 개인들은 인간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기지 못하게 된다. 인류는 병든 공동체를 방치할 수 밖에 없다. 



  자유가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뒤르켐의 충격적인 보고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자유는 좋은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 자체로 추구 되어야 하는 가치가 아닌가? 18-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아노미 자살 현상에 대한 뒤르켐의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자. 아노미 자살자들의 삶은 21세기 한국인의 일상적인 모습과 닮았다. 한국은 자살자가 많은 공동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무심해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 우리는 '세월호'나 '이태원'에서 일어난 지나간 비극들에 대해 강하게 반응한다. 우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진 한국의 자살자들은 이제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게 아닐까? 그들이 지나간 비극으로 불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자유로운 한국 공동체 속에 잠복된 고질적인 사회적 병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이런 추측들에 대한 대답은 이제 영원히 공백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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