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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야민의 안경 Oct 26. 2023

그 순간에 독창적으로 나타나는 재즈에 관해

영화 <블루 자이언트>에서 나타나는 재즈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재즈란 무엇인가? 아니 그 재즈가 무엇인가?

나는 재즈에 관하여 물음을 던진다. 재즈라는 장르로서 통칭되는 그런 음악이 아니라 재즈를 할 때, 조음(調音) 되는 그 무엇에 대해 묻고자 한다.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그 음악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재즈를 들을 때,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연인과의 마법같이 달콤한 저녁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음악을 재생한다. 하지만 레코드된 음악이 막 녹음될 때, 그 재즈에 대해서 의식하지는 않는다. 재생된 소리를 통해 자신이 의도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어떻게든지 재즈가 분위기를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음악은 분위기를 휘젓는다. 특유의 분위기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재즈는 이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재즈는 철저히 계산되어진 재즈다.


완전히 다른 재즈가 있다. 계산되지 않는 그런 재즈가 있다.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은 연주를 하기 전까지 그것이 무엇일지 알지 못한 채로 한다. 물론 약속이 존재한다. 그 음악을 들을 관객들이 알 만한 프레이즈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같이 연주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재즈 플레이어는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는 것을 연주하는 사람이다. 재즈는 철저히 약속의 산물이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그 약속이 무엇일지 의식하지 않고 수행한다.

  다른 음악들과 재즈가 다른 점은 단순히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지 않다. 재즈가 다른 음악과 완전히 다른 이유는 재즈가 모순되어 보이는 양면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재즈는 하나의 노래 제목으로 묶여 있는 곡을 연주한다. 즉 재즈 플레이어는 일단 약속된 음악을 한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할 지, 마지막에 어떻게 끝낼 지, 중간에 어떤 플레이를 할 지 약속한다. 그리고 그 약속들 사이사이에 재즈 플레이어의 자유를 허락한다. 하지만 약속된 곡의 진행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완전히 벗어난 플레이는 잘못된 플레이로서 거부된다. 음악은 멈추며 다른 재즈 플레이어는 벗어나버린 플레이와 함께 연주하기를 그만둔다. 다른 음악들이 악보의 약속에 의존할 때, 재즈는 악보와 악보로 표현되지 않은 적당한 지점에 의존하여 약속한다. 이 약속을 벗어나버리면 더 이상 재즈가 아니게 된다.


재즈 플레이어가 재즈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약속을 하는 것이고 약속 내에서 완전히 멋대로 연주하는 것인가?

  재즈 플레이어는 연주하는 도중 관객들이 모두 알 만한 프레이즈를 연주한다. ‘Spain’, ‘Autumn Lives’ 등 그들은 고전이 되어버린 음악에서 프레이즈를 베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재즈가 독창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재즈 플레이어는 고전이 된 음악을 연주하여 사람들과 교감한다. 그들은 독창적인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잊혔던 고전의 프레이즈를 꺼내면 사람들이 거기에 반응을 해내면 그들은 기억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그들이 들었던 마법 같은 순간이 그 프레이즈가 울려 퍼지는 순간 겹쳐지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독창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무엇이 완전히 다른 인간들의 가장 내밀한 순간을 겹쳐지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독창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내기 가장 희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을 독창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희귀하기 만한 모든 것이 독창적이라는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독창적이게 되거나 모든 것이 독창적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단일한 객체는 그 객체가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독창적일 수 있지만, 그것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다른 것의 모사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귀함은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독창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독특하기 만 한 무엇을 우리가 독창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은 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왜 우리의 전통주를 독창적인 문화라고 하는가? 우리 민족만이 해낼 수 있는 바로 무엇인가가 전통주를 통해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매우 자주 독창적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우리 얼굴을 묻을 때, 우리는 독창적인 순간을 살아낸다. 우리가 얼굴을 묻는 그 순간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다. 바로 나 자신이 그 순간에 살아있고 나의 가족이 살아있어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독창적이다. 재즈에서 일어나는 독창성은 거기서 기원한다.

  재즈 플레이어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순간도 독창성에서 기원한다. 함께 약속을 정한다. ‘함께 여기서 시작하자. 함께 여기서 끝내자. 함께 가장 빛나는 순간의 플레이를 하자.’ 그들은 그 약속들 사이에서 솔로 플레이를 한다. 자유로운 연주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가기에 의미 있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들은 솔로를 하는 사람을 배려한다. 그가 그 순간 그 자신으로서 있기 위해 그들이 바라보고 싶은 그들의 동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들은 그 순간을 위해 자신이 그동안 연습했던 모든 기교를 사용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과거의 노력을 위해 존재하지도 미래의 동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 모든 플레이어는 영원히 현재를 살아간다.



이 영화 <블루 자이언트>의 음악감독은 '우에하라 히로미'다. '히로미'의 음악 스승 중 한 명인 '칙 코레아'는 얼마 전에 작고했다.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그 작품의 제목에 대해서 설명한다. ‘블루 자이언트’는 가장 위대한 재즈 플레이어를 의미한다.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주인공 ‘다이’의 성장 드라마를 상징하는 제목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경하는 일본 제일의 재즈바 ‘블루 홀’에 들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유키노리’. 아름다운 순간을 보내고 있는 ‘다이’와 ‘유키노리’ 사이에서 단지 나란히 연주하고 싶어 하는 ‘슌지’. 3인의 주인공은 제 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서로 다른 시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은 오직 재즈를 함께 연주하는 순간 공명한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영화 속에서는 위대한 플레이어가 누구인지 정의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화 속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어떤 연주자가 위대한 재즈 플레이어인지 감지한다. 가장 위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플레이어가 가장 위대한 플레이어임을 느낄 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블루 자이언트’가 그 영화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연주자들의 연주하는 장면 뒤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통해서 밝혀내어 준다. ‘블루 자이언트’는 초거성의 폭발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3명의 플레이어가 연주할 때, 영화의 스크린 속에서 그들은 블랙홀 이미지가 그려진 배경 속에 잠기어 간다. 그들의 연주는 각각 아름다운 빛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들의 연주가 가장 공명한 순간 블랙홀이 그 모든 것을 빨아내 듯이 등장한다. 블랙홀의 거대한 질량은 위대한 순간을 살아가는 재즈 플레이어들의 빈자리를 의미한다. 주인공 3인의 인물은 이제 그 위대한 연주 순간이 끝나면 더 이상 그 위대한 순간처럼 될 수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그 순간은 오직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다. 그 과거에도 할 수 없고 그 뒤에도 할 수 없다.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한 거대한 폭발 순간과 그 폭발 뒤에 오는 빈자리가 재즈의 본질을 끄집어냈다 생각한다. 블랙홀의 절대적인 질량은 모든 순간을 없애 준다. 마치 만약 누군가 다시 그 순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재현한다면, 필시 그 위대한 순간을 모독하는 행위일 뿐이라 단언하듯이 블랙홀은 그 순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오직 허무한 빈자리 만이 그 위대한 순간의 존재를 실감하게 만들 수 있다.  

  그 한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재즈 플레이어는 약속한다.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서 하이라이트를 하고 여기서 끝을 내자고. 재즈는 한 사람의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칙 코레아를 들을 수 없다. 그의 인생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인생을 공유한 사람들이 남아있다. 칙 코레아의 레코드를 통해 그의 독창적인 인생이 재생되었다고 믿는 것은 그를 배신하는 행위고 그의 위대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독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한다. 우리는 칙 코레아를 따라 한다. 따라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창성을 베어내 버린다.  


그러니 그 순간 나타나는 재즈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 재즈란 과거에 없었고 미래에 없을 그 순간 영원히 현재인 독창적인 것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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