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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쓰 Jul 25. 2020

스물셋을 보내며

아직 사회에 나갈 용기가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학교 입학 전, 중학교 1학년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기숙사 생활을 꼬박 6년을 한 나는 자기 주도적인 생활과 학습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모든 공부는 ‘해야 해서’보다는 ‘하고 싶어서’하는 것들이고 여러 동아리 활동들도 정말 내 학창 시절을 더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밟아갈 길이 명확하고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라고 믿어온 내가 대학교 졸업 이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알던 스스로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 사실은 내가 정말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다 하니까’, ‘실력이 있어야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 없이 훌쩍 사회에 어떻게 첫 발을 디딜지 고민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었다. 스물셋. 젊은 나이다. 하지만 애매한 나이이다. 사회에 나와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어려서 도전할 기회도, 실패할 기회도 많은 나이라고 하지만 학교나 선생님, 정해진 교육과정과 같은 울타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선택은 고스란히 나의 자유이지만, 책임감 또한 막중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렸을 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드는 나이이다.


큰 꿈, 사회에 공헌하고 공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공부해왔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고 직업을 선택할 때쯤 그 꿈이 더 구체화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생각이 현실화되어 있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의 조언과 보호로부터 벗어나 세상에 혼자가 된 것만 같은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나의 모습은 그런 포부와 선한 마음은 잊은 채 사익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청년 실업’, ‘부모님 세대보다 살기 힘든 세대’라는 키워드는 내가 20대로 살고 있는 현실을 결코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다.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써왔다.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뒤로 청심국제중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던 초등학교 때부터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서울대학교 입시를 치르면서 매번 컴퓨터 폴더에는 ‘자기소개서 버전 1’부터 ‘자기소개서 버전 20’까지 차곡차곡 쌓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위해, 대외활동을 하고 인턴을 하기 위해, 학회에 들어가기 위해 또 자기소개서를 썼다. 내가 어떤 공부를 했고, 공부를 하며 무엇을 느꼈으며, 앞으로 무슨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지 썼다. 어떤 동아리 활동을 하고 대회에 나가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생생하고 진솔하게 담으려 노력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고, 여전히 각 자기소개서의 목적이나 기관별 선발 취지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쓴 수많은 자기소개서 중에서 내 학업이나 교내에서의 대인관계 등에 대해서가 아니라 정말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문장은 몇 개나 있었을까?


누군가가 지금 내게 ‘아무런 목적 없이 스스로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어떻게 답을 할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라. 짧은 시간 안에 대답할 거리가 떠오르는가? 처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해오고 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짧은 시간 안에 몇 줄로 설명할 수 있겠어?’라며 쉽게 떠오르지 않는 상황을 합리화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마주해야만 했다.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거나 잘못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아가 어느 정도 형성된 고등학교 3학년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빈번히 했고, 심지어 새내기 시절 새해 목표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것이었음에도 그 목표를 아직까지 달성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변해가고,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지금 현재 상태의 내가 다르기도 하고, 현재의 나에게서도 서로 다른 여러 모습들이 발견되고 충돌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기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MBTI 성격유형검사도 재유 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스스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우니 이를 대신 유형화해주는 검사를 하고 일부 공감되는 특성들이 내 모습이라고 수용하는 게 아닐까?


미루고 미루던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순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진로, 다양한 선택지를 마주하고 있는 ‘사회 초년생’ 직전 단계에 있는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어떤 사람과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등에 대한 대답을 내려야 하는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명확하게 못 내리겠는 스스로를 보며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면서 학업적 측면, 사회적 측면, 대인관계적 측면 외의 나의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취미 생활도 많은 누군가는 ‘사회의 나’가 아닌 ‘개인의 나’의 모습을 잘 모르겠다는 나의 말이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하며 살아오고 주로 학업적인 측면에서 꾸준한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인생을 숙제하듯이 살아온 나로서는 ‘개인의 나’에 대해서 잘 몰랐다.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최소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또한 ‘성과를 이루는 것’만큼이나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의 진전 또한 어느 정도 보인다.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무엇인가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상대와 식사를 하는 중에 이 질문을 하다 보면 각양각색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던져봐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마주하기 참 좋은 질문이다. 내게 가장 완벽한 하루는 맞춰 놓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뜨며 시작된다. 햇살이 예쁘게 비치는 날 아침,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눈을 감지만 잠이 더 오지는 않아 5분쯤 후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맞춰 놓은 알람을 끄고 나갈 준비를 한다. 밖의 하늘은 파스텔 톤의 파랑으로 예쁜 구름들이 군데군데 있고 살짝 선선한 바람이 부는 건조한 날이다. 어제보다 몇 그램 줄어든 몸무게로 아껴 뒀던 옷을 입으니 핏이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액세서리를 착용해 기분이 한 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건강하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으로 두 끼를 먹는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내 건너편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깊은 대화도, 얕은 대화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대화에 정적이 흐르기도 하지만 그 침묵이 어색하진 않다. 팀 회의를 위해 만난 똑똑하고 배울 점 많은 동료들과는 열띤 토의와 빠른 작업으로 큰 성과를 예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이루었다. 할 일을 깔끔히 분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선선한 길을 걸으며 저녁을 즐긴다.


나의 완벽한 하루를 그리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배시시 웃음이 나게 해 주는, 무방비 상태의 순수한 나 자신을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것들을 알 수 있다. 나는 시원한 공기가 얼굴에 스치는 느낌이 좋다. 습하지 않은 맑은 날씨를 좋아하고, 내 몸에 예쁘게 맞는 깨끗한 옷을 좋아한다. 건강하고 칼로리가 높지 않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좋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의하여 문제 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열심히 한 일에 대한 주변의 피드백이나 칭찬을 듣는 것이 좋다. 매일매일이 이런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자, 친한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살면 되겠다”라고 했다.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의 행복을 끌어올려줄 수 있다면 고민해볼 선택지이다. ‘날씨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날씨마저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변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보다는 친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에 더 큰 활력을 얻고, 건강하고 핏한 몸을 위해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하는 하며 뿌듯함을 느끼고, 하루에 한 가지라도 새로운 것을 배우면 그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혼자 일하는 것보다는 똑똑한 동료들과 함께 일할 때 더 살아있음을 느끼고 크고 작은 도전을 많이 한다. 규칙적인 삶에서 오는 행복도 있지만, 가끔 다 무시하고 몸에는 안 좋아도 달달한 음식을 맘껏 먹고 평소보다 오래 자고 넷플릭스를 보며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날에는 치열한 자기 발전과 사회생활을 하는 게 나의 성향에는 더 맞는 것 같다.


내가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에는,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닥친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더 이상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어릴 때 공부하던 시절의 내가 아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내 삶의 방식을 선택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앞으로도 수많은 도전을 하게 되고 나의 선호나 취향, 가치관도 변화해가겠지만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바뀌면 바뀌는 대로, 상처 받으면 받는 대로 또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건강한 정신과 몸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아껴주기만 하면 된다.  


남들이 보는 나는 조금 더 똑 부러지고, 성실하고, 앞가림 잘하고, 계획한 것을 차곡차곡 이루어나가는 사람일 수 있다. 실제로 나의 모습인 것도 맞다. 하지만 이렇게 남들이 보는 나 자신으로 스스로를 정의 내리다 보면 이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압박도 들고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정작 타인들은 나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는 누구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 혼란을 겪게 될 수 있다. 나는 주변의 칭찬과 응원을 들으며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 그 성장통을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른 스무 살 초중반에 겪게 되었다. 앞으로 더한 고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고비를 마주할 땐 최소한 한 겹의 갑옷은 더 입은 상태일 것이다. 외부적으로 아무리 흔들려도 스스로를 지켜 나갈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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