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둥대는금붕어 Dec 31. 2020

바다 건너에서 만난 소울메이트

84번가의 연인, 1987, 데이빗 휴 존스 作

 6년 전부터 간절히 찾던 시집이 있습니다. 출판사에선 절판된 지 오래라 하지, 중고서점엔 없다지. 찾다 지쳐 잊어버린 채로 대학교를 입학했는데 웬걸, 졸업할 때가 다 돼서야 학교 근처에 헌책방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 책방에 제가 그토록 원하던 시집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1960년대의 얇은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만 원이 훌쩍 넘어갔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없었지요. 오히려 싸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무엇 하나에 빠져있는 '덕후'라면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바다를 헤엄쳐서라도 구해오고 싶은 마음을.


 1949년의 뉴욕에도 덕후는 존재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만은 않은 작가 헬레인이지요. 그녀는 고전 영문학 덕후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뉴욕의 서점들은 미국인들이 영국 작가의 책을 사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문학 서적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있다 해도 그녀가 감당하긴 힘들 정도로 비쌀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거리를 헤매는 덕후를 돕습니다. 헬레인은 마침 광고로 마크스 상회를 알게 되지요. 영국에 위치한 마크스 상회는 절판된 책을 취급하는 서점입니다. 1949년 10월 5일, 헬레인은 마크스 상회 앞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마크스 상회와 헬레인의 첫만남입니다.



'고대 문학 작품 취급'이란 문구가 좀 걸리는군요.
비쌀 것 같거든요.
전 고전 작품을 즐겨읽는 가난한 작가인데 이곳엔 제가 원하는 책이 없어요.
찾고 있는 책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5달러 이하의 책이 있다면 이 편지를 주문서로 여기시고 책들을 제게 보내주시겠습니까?



 마크스 상회의 FPD 씨는 헬레인의 목록에 있는 책 몇 권을 보내줍니다.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장과 함께요. 이때부터 바다를 건너 책과 편지들이 오가기 시작합니다. 헬레인은 때론 책에 대해 감탄하고 또 분노에 겨워 비판합니다. FPD 씨는 그녀의 만족에는 안도를, 비판에는 유감을 표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서점 직원들과 책을 찾지요. 그녀가 주문한 책들을 바탕으로 좋아할만한 책을 동봉해주기도 합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헬레인과 FPD 씨는 점점 서로에게 편지 보내는 일을 즐겁게 여기게 됩니다. 같은 분야를 좋아하는 것만큼 친해지기 쉬운 조건도 없으니까요.



핸프 양.
보내신 선물은 오늘 무사히 잘 받았습니다.
생전 처음 보거나 암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품들이 들어있더군요.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랭크 도엘 드림.


1949년, 2차대전 직후의 영국은 식품을 비롯하여 많은 물품들이 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아는 헬레인은 무역일을 하는 친구로부터 식료품을 구해 FPD 씨에게 보냅니다. 영국에 있는 FPD, 프랭크 도엘은 마크스 상회의 직원들과 헬레인의 선물을 나누어 갖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마크스 상회의 직원들은 각자 프랭크 몰래 헬레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도울 것이 있으면 언제든 돕겠다고 말하지요. 그들은 헬레인을 궁금해하며 어떤 사람일지 상상합니다. 쉽사리 만날 수 없는 헬레인과 마크스 상회 직원들은 서로를 상상만 하며 편지를 주고받을 뿐입니다. 영국을 궁금해하는 헬레인이 언제든 영국을 온다면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는 마크스 상회 직원들은 그렇게 더욱 헬레인과 가까워집니다.



 시간이 흐르고, 헬레인은 방송 작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프랭크와 편지를 주고받지요. 이제 그들의 편지에는 단순히 책 목록만이 오가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책, 구절,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각기 다른 나라에 사는 둘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같기에 그들은 감성을 공유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헬레인이 좋아할만한 책이 있을까 하여 대저택들을 돌아다니기도 하지요. 헬레인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침 영국의 여왕 즉위식이 열리고, 여왕 즉위식 특별 세일가로 항공편이 저렴하게 나와 헬레인은 영국행을 결심합니다. 마크스 상회의 직원들도 드디어 헬레인을 만날 수 있다며 기뻐하지요. 그러나 갑작스러운 치과 진료로 돈을 다 쓴 헬레인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한다며 아쉬운 편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직원들은 하나둘씩 마크스 상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프랭크만은 그곳에 남아 헬레인과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프랭크의 온 가족들을 알게 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그러던 어느 날, 헬레인은 프랭크가 합병증으로 죽었다는 비서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간 사정이 좋지 못해 영국을 갈 기회가 없던 헬레인은 그에게 받은 책들을 정리하다 영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20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프랭크, 책을 좋아하는 헬레인을 위해 책을 고른 프랭크가 있던 마크스 상회에 서서 헬레인은 느즈막히 인사합니다. 내가 왔다고.



전에 알던 사람이 해준 얘긴데 영국에 가면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대.
난 영문학속의 영국을 보고 싶다고 했고 그는 볼 수 있을 거라 했어.
정말 그럴까?
주위를 둘러보며 난 깨달았지.
바로 여기였어.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애정과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모두 갖추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알아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것과 알아주는 것은 다른 일이지요.


 프랭크는 멀리서 꾸준히 편지를 보내오는 헬레인이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 또한 책에 관심이 많았기에 헬레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지요. 또한 헬레인이 고른 책들과 편지의 내용을 보며 헬레인이 좋아할만한 책을 보냈다는 것은 프랭크가 헬레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헬레인이 어려운 영국의 상황을 알고 식료품을 보내준 것처럼요. 생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둘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같은 국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국경이 없다는 걸 이들은 몸소 보여주지요.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은 20년의 세월이 그 깊이를 말해줍니다.





 당장 돌아보면 학교를 졸업해서, 직장이 바빠서, 결혼을 해서... 많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단절됩니다. 카카오톡 한번이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누가 뭘 좋아했는지도 금새 잊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요. 먹고 사는 게 힘들다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마음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야 하겠지요. 형식적인 위로나 인사보다는 보다 개인적이고 조심스러운 편지를.


주변의 덕후들을 떠올려봅니다. 그 애가 좋아하는 것에 그 애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자고 이 영화를 봐서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