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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둥대는금붕어 Aug 31. 2021

비 와요

언어의 정원, 2013, 신카이 마코토 作

여름이 끝나고 이윽고 동복을 입는 계절이 오고, 기말 시험에서는 역시나 심각한 점수가 나왔다. 비싼 가죽을 몇 장이나 버려가며 겨울 방학엔 또 아르바이트를 했다.
겉옷이 한 장씩 두꺼워질 때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낼까 생각한다.


2021. 08


 그래서 부추전을 해먹었습니다. 비 올 때 저희집은 그렇게 먹어요. 그게 암묵적인 규칙이거든요.


 비가 계속 오길래 엄마한테 비 오면 뭐가 생각나냐고 물어봤는데 모른대요. 저는 비 오면 노래 듣거든요 채은옥의 빗물이라고. 처음엔 엄마도 좋아했는데 제가 하도 들으니까 지겨워졌대요. 가사가 진짜 좋은데... 그런데 제가 많이 듣기는 했어요.


 그래서 취향을 바꿨어요. 이제는 비 올 때마다 단편 영화를 한 편 봅니다. '언어의 정원'이라는 50분짜리 애니메이션이에요. 몰랐는데 너의 이름은 감독이 만든 거래요. 저는 사실 그 영화 별로 재미있다고 못 느껴서 감독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는데 이 영화만큼은 좋아요. 그렇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남학생과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 뭐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저는 그 이유만으로 영화를 안 보는 건 좀 아쉬운 거 같아요. 그래서 그냥 봤거든요. 영화에는 인물의 사정이 뭉텅뭉텅 짤려있기는 해서 좀 찾아보면서요.


줄거리를 다 말하면 재미없을 거 같아서 좋았던 장면을 떠올려봤는데요. 저는 남학생이 선생님한테 울면서 소리치는 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저는 현실에서 누가 저한테 그런 표정짓거나 말하면 상처받을 거 같거든요. 너는 나랑 상관없어, 뭐 이런 말을요.  


 그런데 남학생이 울면서 그러거든요. 선생님은 그렇게 평생 중요한 건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로 혼자 살아갈 거냐고요. 저한테는 그게 어떻게 들렸냐면 선생님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왜 혼자 속으로 파고드냐 그렇게 들렸거든요. 아마 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리치고 울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런 말도 다 용기잖아요.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좋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게 사랑일 수도 있겠죠. 오늘 그 장면 몇 번 돌려봤는데 눈물났어요 좋아서.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는 거 같아요. 저도 들으면서 위로받았어요. 그래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전 일본 애니메이션이 감정을 너무 낭비한다고 생각해서 싫었는데,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아요. 그렇게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생기면 그게 사랑이겠죠. 사람들이 왜 오글거린다고 하는지 알겠는데, 그래도 저는 이 영화 좋아요. 비 올 때마다 이 영화 생각나서 비 오는 날이 더 좋아졌어요.


  그 둘이 비 올 때마다 갔던 곳은 실제로 있는 곳이래요. 일본의 신주쿠 교엔이요. 나중에 가보고 싶어요. 막상 가면 실망할까요? 별 느낌 없을 거 같긴 해요. 제가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렇게 하나의 공간에 정서가 생기는 건 좋아요.


 이 남학생처럼 본인이 상처받거나 외로운 것보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게 더 우선이었던 적이 있으세요?

 저는 있어요. 그때는 누구보다도 솔직할 수 있었답니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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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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