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합니다. 분명 대학에 들어올 때는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한강 찾아 아름다운 세상이라며 이리저리 잘도 다녔는데 졸업이 다가오니 졸업 논문에, 취업난에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라며 세상 욕을 합니다. 예전에는 잘만 하던 연애도 이제는 지겹다고 도리질입니다. 뭣도 모르고 만날 땐 좋았는데 몇 번 헤어지고 만나고 하다 보니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라면서, 예전엔 좋으면 장땡이었는데 이제는 나 편한 게 최고랍니다. 다가갈 시간에 먹고 살 궁리나 하자고. 혼자가 최고라고. 우리는 맞아맞아 그래그래 하면서 세상 다 산 척을 합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영화를 봤을까요? 누구에게나 선뜻 추천하기도, 좋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영화 ‘공기인형’을 보는 내내 마음이 콕콕 찔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리얼돌이라는 소재가 불편해서였기 때문일까요? 그 인형에 마음을 만들 생각은 누가 한 걸까요?
노조미는 히데오의 공기인형입니다. 복잡한 과정 없이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던 히데오가 선택한 대체품이지만 노조미에게 마음이 생기면서부터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노조미는 비디오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준이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바다도 보러 가고, 시간을 보내며 점점 가까워지지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가게는 불빛들로 반짝거립니다. 신이 난 노조미의 실수로 팔이 찢겨 공기가 빠져나가게 되고, 준이치는 노조미가 공기인형인 것을 알게 됩니다.
보지 말아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쪼그라드는 자신을 보는 준이치에게 노조미는 자신을 보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준이치는 테이프를 챙겨와 노조미의 팔에 난 구멍을 막고 공기구멍에 숨을 불어넣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숨으로 몸이 가득 찬 노조미는 준이치를 끌어안으며 말합니다. 조금만 더 이렇게 같이 있자고.
놀랐지? 아니야. 실은 나도 너와 같아. 정말?
자신도 공기인형이라고 말하는 준이치 덕에 노조미는 조금 더 솔직해지고 마음이란 것에 대해 더 섬세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이 세일 중인 구형 모델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이름이 사실은 히데오의 전 여자친구 이름이라는 걸 아는 노조미는 자신에게 마음이란 것이 생겼다며 히데오에게 자신은 대체품일 뿐이냐고 묻습니다.
마음이 없던 때로 돌아가주면 안 될까? -마음이 없을 때가 좋았어? 맞아. 피곤해. 이런 거 귀찮아서 널 고른 건데...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은 그 마음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데, 이제 마음이 생긴 노조미는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지요. 상처받은 노조미는 자신을 만들어준 소노다에게 찾아갑니다. 다들 비슷하게 만들어지지만 돌아올 때의 표정은 제각각이라고 말하는 소노다는 노조미에게 묻습니다. 노조미가 본 세상은 슬픈 일만 있었는지, 아니면 행복한 일도 있었는지. 그렇다고 말하는 노조미를 보며 안심하는 소노다에게 노조미는 말합니다.
나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저는 이 말이 마음을 가지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로 들렸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노조미가 행복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순수한가요. 정작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그러지 못하는데.
나 말이야. 누군가의 대신이라도 괜찮아. -너는 누군가의 대신이 아냐. 뭐든 해줄게. 난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게.
이것은 노조미의 사랑 고백입니다. 나는 마음이 있지만 본래 누군가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난 것. 온전히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인형. 그렇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너를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준이치는 노조미에게 자신의 공기를 빼달라고 부탁합니다. 노조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요. 자신이 누구의 대체품도 아닐 수 있다는 말에 화색이 도는 노조미는 정말 준이치의 공기를 빼주었을까요?
소재가 소재인 만큼 보는 중간중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한국의 정서상 리얼돌이 등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일 수 있지요. 그런데 노조미의 마음이 보이는 순간순간 부끄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자본주의, 경쟁사회. 내가 앞서나가야 도태되지 않는 삶. 우리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며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무감각해지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요. 그러나 마음이 비어있다면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결국 삶이란 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생각하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속의 공기가 빠져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