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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22. 2022

여행과 방랑의 차이는

뒤늦은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의 또 후기.

1.

한국에 돌아온 날 오후에 출근했다. 280여킬로미터를 걸었던 날들이 진짜였나 싶을 정도로 금세 익숙해졌다. 하기야 그 길을 걸을 땐 내가 한국에서 뭐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그 길에 적응했었다. 나이가 먹으니 오히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조율하는 법을 체화하는 듯 싶다. 그 조율 혹은 적응의 과정에 따라 약간씩 후유증은 있을 지라도. 


2.

나는 귀국했지만 여행 중 같이 다녔던 배낭은 아직 로마에 있다.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 보딩 게이트에서 '배낭'이 기내 선반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으니 별도로 실어가겠다고 해서 환승을 하는데 괜찮나? 싶어 좀 꺼림찍 했지만 문제 없다는 에어포루투갈 직원의 말만 믿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배낭을 맡긴 게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배낭은 '이름 적히지 않는 테그'가 붙은 채로 로마 공항에서 대기 중이다. 로마 공항에서 환승할 때 알이탈리아 항공 직원도 내 배낭이 함께 서울로 갈 거니까 걱정말라고 했다. 어차피 비행기 탑승 전 배낭을 가져가며 내게 '테그'를 주었으니 그것만 있으면 찾을거라 생각해 한국행 알이탈리아 항공 비행기를 탔다. 인천에서 내려서 기다렸지만 내 배낭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공항 짐 찾는 곳에서 조치를 취해줬다. 배낭이 로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내일이나 모레 쯤 한국으로 가져와 배송해주기로 했다. 짧은 영어와 급한 마음 탓에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차피 열쇠와 지갑과 휴대폰 등 집에 귀가하기 위한 필수품은 보조가방에 챙겼으니 설사 배낭이 오지 않더라도 집엔 들어갈 수 있겠지. 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원인이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집에는 무거운 배낭 대신 보조가방과 면세품만 들고 왔다.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할 때 짐이 줄긴 처음이었다. 아마도 일본 도쿄에서 하네다와 나리타 공항이 헷갈려 간발의 차로 귀국했던 것 이후 가장 큰 여행 해프닝이 될 듯 싶다. 


3.

여행 기간 중 면도를 하지 않고 다녔다. 휴가때 수염을 길러보는 게 나름의 관행이다. 면도를 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다. 휴가가 길었던 덕이다. 지금은 입을 내밀면 입 주위의 수염이 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자랐다. 여행 중 사진을 어머니께 카톡으로 보내드렸더니 깔끔하게 다니진 못할 망정 왜 '망구'처럼 하고 다니냐며 이역만리에서도 잔소리 문자를 보내셨다. '참 어머니도' 하고 속이 좀 상했다. 그 마음 대신 '이렇게 다녀야 소매치기가 안붙고 덜 어리게 보여 무시를 덜 당한다는 말로 눙쳤다. 



한때 인류는 수염을 기르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수염을 깍지 않고 다닌다 해서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면도기 만드는 회사들의 농간(?) 탓에 수염은 깍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어느덧 인식되었다. 따지고 보면 수염은 머리카락과 함께 인간이 자연발생적으로 외모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원초적인 수단. 또 내 입으로 들어간 숱한 음식의 각종 영양소들이 생리적인 변화를 일으켜 가시적인 무엇으로 내 몸에서 자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수염을 기르면 밥을 먹을 때 지저분하고 여러모로 불편하다. 하지만 한국만 하더라도 불과 1세기 전의 남성들은 수염을 길렀다. 수염은 기능이라기보다 일종의 남성성의 '상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2차 성징과 함께 수염이 나기 시작하니까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각자 내제한 자기 고유의 '성적 표징'을 은근히 내보이고 싶어하는 게 또 본능. 그것을 교묘하게 가리거나 혹은 드러내며 각자 매력 혹은 자기 만족을 추구한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도 '남성성'을 드러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망구' 같다고 타박한 잔소리에 은근히 의기소침했던 이유다. 부모에게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많았던 아이가 그 욕구를 채우지 못했을 경우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심리가 강해지고 이게 또 결국 '자기 표현'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닐까? 수염을 3주가량 길러보니 이런 생각까지 미친다. 2주 정도 길렀을 때는 미처 들지 않았던 생각이다. 


4.

산티아고 여행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하루 하루의 여정을 기록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다. 게다가 전체 여정을 다 걷고 온 이들에 비해서 나는 그 절반도 걷고 오지 않았다. 해서 나처럼 전체 일정을 다녀오지 못한, 다녀올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글은 써볼만 할 듯. 다행히 처음과 끝은 했고 중간은 한국인 순례길 여행자들이 꺼리는 '점프'를 했으니 완주한 이들의 심정과 또 그렇지 못한 이들의 심정을 두루두루 다 체험했다고 봐도 거짓은 아니다. 


5.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세상의 여행자들은 사실 일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이들에게 가장 감사해야 한다. 내가 누린 여행의 모든 것들이 결국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기에 혹은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행을 다녀와 느끼는 이 일상의 견고함과 보이지 않는 연결이 결국 우리가 훌쩍 어디로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환경. 그 환경이 종종 권태롭고 뭔가 옭아맨다 해도 그것을 인내한 이들 덕에 유지하고 운영됨을 인지해야 한다. 그 인지가 또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무의미함을 어느정도 상쇄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여행을 하면서 세상과 '이격'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여행과 방랑의 차이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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