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로 30, 미술관 앞
돌아오고 있는 중이지? 네가 돌아오는 주기는 있는 것 같다가도 없는 것 같네.
이번에는 언제쯤일까, 그리울 때마다 숨을 크게 쉬는 중이야.
예전에 너를 새장 안 새처럼 기를 때 말이야, 넌 발칙한 면이 있었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추겼잖아. (지금도 가끔씩 그렇지만.)
또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을 쉬도록 만들었지. 그 증상을 참지 못한 내가 엄마에게 ‘한숨이 계속 나온다고, 어쩔 때는 숨을 지나치게 쉬어서 머리가 어지럽다고’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숨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지. 그런데 그건 너를 무시하라는 말이기도 하잖아!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 결국 엄마의 조언을 따르지 못하고, 내가 많이 괴로워해서, 너는 적당한 선에서 그 장난을 멈춘 듯했어.
너를 처음 놓친 날, 나는 실수로 너를 잊고 책상에 돌아와 앉아 울었지.
다행히 그때는 친구들이 왜 그런지 물어봐주었기 때문에, 괜찮았어. 그렇게 몇 번(거의 규칙적으로) 너를 놓치고 나서는, 사람들은 더 이상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어. 그때는...
너를 놓아주었을 때 기억하니? 너는 육지에서는 걸음이 너무 느려, (너도 알다시피) 너와 달리 나는 육지에서 매우 빨리 달려야 하는 동물이거든. 너는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뿐, 그다음부터는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더라. (심지어 몇몇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면서.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 모습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어.)
또 돌아오고 있는 중인 거지? 지금처럼 네가 가끔은 보였으면 좋겠어. 놓아주었는데 다시 나를 보러 오는 너에게 어떻게 기억하고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을 때, 네가 ‘난 처음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목소리가 참 담백했는데.
나도 가끔씩 너를 생각해. 밤에 잠에 들면서, 엄마의 눈을 보면서, 언니의 옆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손을 보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건너편 소방서에서 소방관들이 갑자기 뛰어나오며 출동하는 것을 보면서, 질투하거나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싫어했던 친구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언젠가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날들도 있겠지. 그때는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만 남을까봐 가끔씩 섬뜩해. 너는 돌아올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희미해져...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2021년 1월 밤에 마음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은 숨을 참으며, 마음에게
<삼청로 30, 미술관 앞>이라는 공공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삼청로 30, 미술관 앞’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가지는 최소한의 주소다. ‘개인과 사회의 기억에서 만들어지는 서사를 추상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주로 하는 양혜규 작가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이 프로그램에,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추상적으로 시각화해보고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모인 편지들은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기도 할 텐데, 내 편지에는 ‘전염병’라는 키워드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염병이 돌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에게 쓰게 된 이 글에는 시대에 대한 흔적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편지는 시대적 기록으로써의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최주현 에디터, "[Opinion] '삼청로 30, 미술관 앞'으로 보내는 편지 [미술/전시]", 아트인사이트, 2021년 1월 15일 자 기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