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간 석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굽기 Mar 01. 2019

실눈 뜨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닮은 방을 만들어 가는 과정

이런 것도 유행을 타는 걸까. 남이 사는 공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텍스트들을 보면 마음이 확확 움직인다. 왜, 요즘 자주 나오는 원룸 만들기, 집 꾸미기 류의 온라인 집들이 글들처럼. 사실 이게 별것도 아닌데, 그냥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고 그렇다. 인테리어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을 뭐 페인트칠부터 어쩌겠다 하면서 칼을 갈고 있는 것도 아닌지라 참 쓸데없는 짓이긴 하지만, 언제는 내가 쓸데 있는 짓거리 하며 살았나. 


아무래도 오지랖이 넓으니 수비 범위도 넓다. 공간이라면 다 좋다. 침실에 관한 이야기든 화장실에 관한 이야기든 다 좋다. 서재나 작업실이면 제일 좋다. 하다못해 남이 차린 커피숍이나 책방 같은 것들도 재밌다고 보고 있다.


어쩌다 이런 흥미가 생긴 건지, 사실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예전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쓴 적도 있듯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공간에서 꽤 오래 살았다. 성장하는 내내 변변한 내 공간이 없었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생긴 내 방은 타지로 대학을 가면서 창고가 되었다. 어쩌다 집에 내려가면 온갖 잡동사니와 동침을 해야 했다. 군대 가기 전에는 한 방을 세 명이 쓰는 쉐어하우스나 한 방을 세 명이 쓰는 기숙사에 살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는 기지개도 못 켤 크기의 방에서 살았다. 벽지에는 깔라만시 무늬가 있었다. 음, 대충 이 정도면 내방결핍증이 생길 법도 하지 않을까. 하기사 요즘 안 그런 사람 있나. 그래서 집 어쩌구 하는 것들이 유독 유행하나 보다.


이건 당연한 소린데,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공간에 대한 환상도 좀 생겼다. 내 환상을 말하자면, 뒷구르기 하면서 봐도 내 방인 공간을 만들자! 다. 간소하게 말하면 나 닮은 방 만들고 싶단 소리다. 안다. 대학가에서 월세 겨우 내며 자취하면서 날 닮은 방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쓴 글에서, 길거리를 다니는 대학생들에게서 그들이 사는 방을 읽어낼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역추산이 불가한 공간. 결국, 방이 주인과 닮지 않았다는 소리다. 자신과 이질적인 공간에서 사람이 잘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연명하는 거지. 날 닮은 방을 만들고 싶다는 환상은 그런 생각에서 나왔다.

동생 노트북을 내 방에 데리고 와서 컨셉샷을 찍었다.

최근에 가족이 모두 윗동네로 이사 오게 되면서 내 공간을 꾸릴 기회가 생겼다. 물론 기회가 생긴 것이지 확정을 얻은 건 아니다. 방이란 게 내 생각대로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길쭉한 직사각형의 형태라서 아무래도 가구 배치가 좀 어렵고, 커다란 창이 있긴 한데 햇빛은 안 든다. 벽지는 하늘색이 살짝 섞인 회색. 가구는 예전 집에 있던 걸 가져온 탓에 색깔이 제각각이고(하늘색 방에 진갈색 침대라니!), 설상가상으로 나는 지옥에서 온 맥시멀리스트라 짐도 많다. 수납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쉽게 말해 깽판이다. 내가 좀 정신이 없는 걸 보면 이게 날 닮은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사소한 데서 내적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책상을 고르는 일이 그렇다. 책을 읽거나 뭘 놓거나 할 때는 원목이든 뭐든 나뭇결 느낌이 좀 가미된 게 예뻐 보이는데, 컴퓨터 놓고 하는 데는 그냥 검정, 회색, 흰색 책상이 더 어울린다. 늘 이런 식이다. 뭐든지 기회비용이 따른단 소리다. 고심 끝에 책상은 회색으로 골랐다. 하늘색 섞인 회색 벽지에다가 원목 책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아무튼 이런저런 것들을 포기하고 선택해 가면서 뭔가 엉성하게 얼개가 완성되고 있긴 하다. 일단 가구는 다 들어왔으니까. 이제 중요한 건 나를 닮게 하는 것, 즉 취향을 묻히는 일이다. 물론 지금도 나름대로 뭐가 묻어 있긴 하다. 카메라 다섯 대가 진열되어 있고 책상엔 사람 머리통만한 스피커가 두 통 있고 작업할 때든 게임할 때든 쓰는 모니터가 있고 책꽂이에는 책 수백 권. 헤드폰 두 대도 거치대에 걸려 있고. 침대에는 날 닮은 인형도 있다. 옷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아직 뭔가 비어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뭘 어쩌면 좋을지. 뭔가 채우긴 채웠는데 미적인 건 하나도 없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이건 날 닮은 방이 아니라 날 닮은 시체라는 느낌. 좀 싸하다.


표지 사진에 있는 책은 그래서 샀다. 뭐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이라도 어떻게 달아야 할지는 감이 오겠지. 돈이 좀 생기면 장스탠드를 먼저 사고 싶다. 벽에 붙일 만한 것도 뭐 하나 사야지. 텅 빈 회색 벽은 너무 멍하니까. 난 이렇게 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좀 모자라게 좋아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