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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y 04. 2019

분수는 오늘도 선을 그리고,

소비가 긍정되는 시대에 아직 남은 선긋기에 대해서

최근의 트렌드는 사소한 허영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스타벅스 커피를 사 마시는 것을 멍청한 짓이라 까대고 손가락질하던 (물론 그 발화의 구성 성분이 높은 정도로 여성혐오의 목적을 담고 있었으며 실제로 스타벅스 커피가 그렇게 '멍청할' 정도로 비싼 물건도 아니지만) 몇 년 전의 문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사실 조금 웃기다. 허영이라는 단어에 긍정이란 수식이 가당키나 했었나.  


허영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이런 뜻이 나온다.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榮華).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 


생각해보면, 분수에 넘친다는 말이 현 세대에 어울리는가 싶다. 그래, 물론 조금 극단적으로 가서, 최저임금 수준의 아르바이트로 사는 사람이 당장 내일 펜트하우스나 타워팰리스 프리미엄 층을 계약해서 집안 가구에 전부 금칠을 하겠다고 덤빈다면 이건 분수에 넘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통 허영이라고 지적되어 오던 것들이 그 정도 수준이었느냐를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스타벅스는 어떠했는가. 아이폰은 어떠한가. 무슨 가방이라든가. 기껏해야 몇십, 입 떡 벌어지게 해 봐야 몇백만원 수준이다. 중산층 기준으로 하여, 가정이 파탄나지 않는다. 밥을 좀 싸게 먹거나, 돈을 좀 악착같이 모아서 하나쯤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삶에 기름칠이 된다면, 실속이 없다거나 필요 이상이라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딱 필요한 만큼만 절약을 어쩌고 하는 말을 하고 싶다면 당신 집 거실 텔레비전부터 배불뚝이로 회귀하도록 하자. 배불뚝이 텔레비전도 저녁 시간 드라마 잘 나온다. 그런데 아마 그러기는 싫을 거다. 난 저들과는 다르니까. 결국 허영이나 분수라는 규정 자체가 애초에 선긋기에 불과한 거다. 우리가 조선시대풍 자급자족 농촌 경제에 사는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북한도 자본주의 흉내내는 마당에 무슨 아이폰이나 생수가지고 허영 타령이람. 

카페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허영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영의 긍정화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 계급을 생각하고 '분수'를 규정하던 사회가 보다 평평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므로. 물론 여기에 얽힌 자본주의 어쩌구 소비주의 어쩌고의 이야기도 잔뜩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네 수준에 맞는 삶을 살아라'가 시대정신이었던 세상보다는 '그냥 몇 달 존버해서 하나 사버려 그게 행복하다면'을 내거는 세상이 낫다고 생각한다. 소비가 행복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선을 긋지 않는 게 맞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사회에서도 타인의 소비에 대한 손가락질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비슷한 소비를 하는 사람들끼리도. 본인은 명품 의류를 착용했을지언정 타인(보통은 타 성별이 자주 지목되곤 한다)의 점심 특선 파스타는 '소박한 된장찌개'가 아니라는 이유로 해당 메뉴의 소비자를 '김치'라고 부를 이유가 된다. 내 소비는 필요하지만 남의 소비는 허영이라는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들은 절제해야 해' 와 '내가 사고 싶은 거 사는 거지' 그리고 '저 사람들은 과소비를 해'. 이 세 가지 생각이 충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저기다 박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단어가 긍정적인 척 모습을 바꾸었을 뿐 분수는 아직 물을 뿜으며 땅 위에 선을 그리고 있다. 


슬슬 허영 혹은 분수라는 단어 자체를 가져다 버릴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란 게 원체 이기적이라, 허영을 부려도 돼, 라는 말 앞에는 사실 '나는'이라는 말이 자주 괄호랑 같이 붙어 있다. 그러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그 단어를 말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 머릿속에서 그 단어를 잊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래서 누구도 타인의 소비를 재단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음, 아마 아니겠지만.


- 디에디트의 '에비앙을 샀다' 글을 읽고 남기는 생각의 연장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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