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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Sep 14. 2020

계획주의자의 우발적 노이즈캔슬링

예측불허의 2020년과 귀를 틀어막기 위한 여정의 종착지

처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 관심을 가진 건 철저하게 실용적인 의도에서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2020년 9월의 내가 한국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쯤의 나는 교환학생 신분과 함께 한국을 훌쩍 떠나 9개월 정도를 독일에서 지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휴식이라든지, 시야의 지평 넓히기라든지, 사회학의 본고장에서 사회학 배우기라든지. 아무튼 댈 수 있는 핑계야 많았고 떠나는 데 필요한 일련의 과정도 성공적으로 마쳤으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떠날 몸과 함께할 물건들 뿐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건 그 함께할 물건 리스트를 꾸리면서였다. 떠날 때에 잊어서는 안 될 물건 같았다.


그게 사실은 핑계였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저런 괜찮은 음향기기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심지어 노이즈캔슬링이 지원되는 기기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능 역시 꽤 괜찮았다. 그 중 하나는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마샬이었으니까. 그 철제 경첩과 금색 필기체는 정말 예뻤는데!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가 한 번 꽂힌 물건을 마음속에서 몰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같은 용도의 아주 예쁜 물건이라 할지라도. 점수를 따내려는 공격수는 시시때때로 교체되어가며 달려들어왔다. 2019년 말에 떠난 코타키나발루 여행에서 5시간동안 그 친구와 함께 있었을 때, 나는 귀가 아팠고, 뭐 그랬다. 아 뭐 여행을 하려면 하나 사야겠네. 유럽에 가려면 오래 날아야 하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다섯 시간을 끼고 있었을 때 아프지 않은 게 얼마나 있겠어, 아니,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나는 크고 그럴듯한 게 사고싶었으니까. 이미 내 머릿속에서 나는 포터블하고 편안하고 비행기의 소음을 전부 막아주는데다가 예쁘기까지 한 신원미상의 음향기기를 데리고 유럽을 활보하고 있었다.


마샬의 MID ANC. 정말 예뻐서 사진 소품으로 정말 자주 활용했다.


환상 속에서 2020년이 되었다. 상상했던 것과 같은 용도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사용하는 것이 멀고 아득한 일처럼 취급되는 때였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교환학생이란, 음, 희망고문의 유의어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걸 사는 일이 더 이상은 실용적인 의도를 충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리다. 합리화의 마지막 보루가 깨졌고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알 수 없는 계절이 왔다. 바깥에서 긴팔셔츠를 입는 게 순식간에 버거워졌고 이런 날씨에서라면 헤드폰 같은 걸 쓰는 일은 아직은 버틸 만했지만 삼십 일 정도만 지나면 스스로에 대한 고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에어컨과 버스의 에어컨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우린 모두 안다.


아, 그러다 최악의 순간에 구매 버튼을 눌렀다. 주변의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나의 다음 학기는 해외에서 이어질 거라는 것에 대한 자기암시가 필요했다. 그냥 스트레스 받아서 충동구매를 했단 소리다. 어쨌든 그렇게 몇 개월간 고민했던 물건의 상자가 도착했고 때는 5월 중순이었다.  계절은 슬슬 더 노골적으로 이른 여름의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나도 스스로 어쩌자는 건지 몰랐다. 물건이 생긴 김에 일단 뒤집어쓰고 퇴근시간을 보냈다. 밤 열 시의 에어컨 아래에서도 머리 위에 뭔가를 올려놓는 것이 더 이상은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일을 관뒀다. 이젠 출퇴근마저도 없었다.


철저한 실용적 사유의 박탈 이후, 헤드폰은 봉인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출퇴근이나 등교를 꾸준히 하지도 않는데다가 어디 여행을, 하다못해 카페조차 가지도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와중의 그런 상황, 게다가 여름의 불볕더위라니. 노이즈 캔슬 헤드폰이 존재감을 잃기에 딱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폭염의 보름 정도를 파우치 속에서 지내고 나서 헤드폰은 다시 할 일을 찾았다.


태풍이 연달아 왔다. 그리고 기억나는 해들보다 훨씬 빠르게 가을이 왔다. 공기는 쌀쌀하고, 방의 창문을 열고 선풍기 하나를 틀면 더할 나위 없는 온도가 된다. 다시 긴팔 셔츠를 꺼냈다. 매년 이맘때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헤드폰 쓸 수 있는 계절이 왔다고. 이제 곧 모직코트를 춥거나 덥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올 것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나 홍차를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통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계절이지만 사는 게 늘 그렇듯 이 때의 일상이 아름다운 것들로만 뭉쳐져 있지는 않다. 좋아하는 것 외의 모든 게 소음이다. 집 바로 옆에는 서울 도시철도 1호선이 지상으로 지난다. 오래된 선풍기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의 생활소음이 딱 짜증날 만큼 귀를 짓누른다.


MBTI를 진지하게 믿지는 않지만, 누가 그랬던 건 기억난다. INFJ는 감각에 완전히 집착적일 만큼 예민하거나 심각할 만큼 둔감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나는 INFJ이고 감각이 신경질적인 수준으로 예민해 스트레스성 어쩌구 질환들을 달고 산다. 모든 단면이 거칠거칠하지만 특히 가장 예민한 건 청각이다. 작은 소리에도 히스테릭하게 반응한다. 새내기 시절 기숙사에 들어가서 스물셋에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내 잠자리는 매일매일 주황색 3M 귀마개와 함께했으니까. 내가 귀마개를 낄 수 없는 일상의 시간들에서는 자극으로부터 들어오는 스트레스를 마음 속으로 삭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스물다섯의 가을에는 여전히 온갖 소음들이 있고 맘 편히 스타벅스로 도망쳐버릴 수도 없는 요즘의 나날들 속에서 소리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실용적 의도를 잃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겸연쩍게 내 옆자리를 지킨다. 헤드폰을 스마트폰과 페어링하고 빗소리를 아주 작게 틀어 놓으면 도시철도의 우렁찬 소리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러면 나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가끔씩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코타키나발루에 갈 때 썼던 예쁘장한 친구와 달리 다섯 시간을 넘게 끼고 있어도 귀가 아프지 않다. 가끔은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재생해 주는 소리도 제법 쓸만하다.

우발적으로 구매해서 아주 잘 쓰고 있는 이 글의 주인공, 보스의 NC700

모든 순간순간을 위한 계획을 짜고 살아가는 편이다. 어딘가 여행을 갈 때마다 떠나기 한참 전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고, 버스 대기 시간을 포함한 동선을 십 분 단위로 정해놓고, 그러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지도 어플을 뒤적거린다. 고등학생 때는 매일마다 계획을 시간 단위로 정해서 움직였다. 예전에 데일리 다이어리가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글을 쓴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데일리 다이어리의 일일결산적 성격에 관한 이야기였지 계획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언제나 한두 달 뒤의 계획을 일찌감치 정해 놓아야 직성이 풀렸고 년이나 개월 단위의 생각도 항상 줄 없는 먼슬리 다이어리에 미리 정리해 두었다.


그런 나에게 코로나는 사고의 기반을 뒤흔드는 쇼크였다. 일 년 전부터 준비했던 모든 계획이 근본부터 완전히 틀어졌고, 주 단위의 작은 계획들조차도 예측불허로 빠르게 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오늘은 이걸 했어야 했는데, 내일은 저걸 할 예정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어야 했는데, 지금 원래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려 했는데. 아무런 계획도 예측도 통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만이 나를 날로 잡아먹고 있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나의 그 무식한 계획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다. 조금만 틀어지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실용성을 붙잡으려 몸부림치다 야매로 깎은 토템처럼 해버린 소비. 계획을 위해 우발적인 소비를 하다니. 그 때 그걸 사면서 친구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만약에 내가 독일을 못 가면, 나는 여름 다 오는 때에 집에 틀어박혀 지낼 거면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산 멍청이가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나는 멍청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글을, 그 헤드폰을 머리에 얹은 채 써내려가고 있다. 이걸 머리에 얹고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이후의 계획들을 써내려갈 것이다. 도시철도의 소음도 선풍기의 삐걱거림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생활소음도 없이. 처음에 정해 놓은 실용성을 잃어버린 멍청이가 된다고 해서 인생이 영영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계획이 틀어져도 일상은 이어지고 이래저래 복장이 터지지 않은 채 밥을 먹고는 산다. 모든 사물이 당초의 용도로만 활용되지는 않는다. 우리 엄마는 나를 과학자로 키우려고 했다는데, 나는 과학은커녕 침대도 잘 모르는걸. 그래도 침대에 누워서 그럭저럭 잠도 잘 잔다. 3M 귀마개도 없이.


모든 계획을 빼앗긴 일상이 매일매일 행복한가요 하고 물으면 아니요 나랑 멱살잡이하실래요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의외로 그럭저럭 이어진다. 가끔 독일 방향을 보며 허공에 욕을 하긴 하지만, 그 점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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