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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y 11. 2021

두 우주의 박치기, 한 소끔의 쎄함

최선을 다해 싫어하는 사람 만나기

한동안 보급형 핸드폰을 사용하던 때가 있다. 용량이 부족하다 보니 사진들이 네이버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백업이 되게 설정을 해 두었는데, 사실 백업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 그 사진들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핸드폰도 바꾸고 나니 클라우드를 쓸 일 자체가 없어졌다. 그래서 한참을 잊고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네이버가 웹사이트 로그인을 할 때마다 몇 년 전의 추억 사진 같은 걸 보내주기 시작했다. 3년 전, 4년 전, 5년 전, 8년 전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가 추억보다는 괜한 낭패감이 들었다.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연락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요즘이야 이러다 이십 대를 변변한 사진도 없이 보내 버리겠다는 불안감이 생겨 허겁지겁 내 사진들을 찍어 올리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사진을 거의 찍지도 올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와 사진을 같이 찍었다는 것은 나와 드물 정도로 가까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때 그러면 뭐하나.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걸. 저 순간에는 우린 평생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친구와는 나이들면 어떤 동네에 집을 구해 함께 살자던 이야기도 하곤 했을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면 제법 친했다고 할 수 있겠지. 같이 사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는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조차 보내기가 좀 그렇다. 사람은 이렇게나 쉽게 흩어져 버린다. 친구 사이의 헤어짐을 상상하면 뜨거운 피의 청춘 만화 같은 주먹다짐, 혹은 네이트 판에 나올 법한 흉흉한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사실 둘이서 헤어지기 위해 그렇게 다들 개새끼가 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티나는 모습으로 개새끼가 된 적도, 그런 모습의 개새끼를 본 적도 없다. 그냥 어느 순간 애매해지는 시간을 마주할 뿐이다. 사건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한편 요즘 연락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가까워진 건지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종종 밥도 먹고 사진도 찍고 뭐 그런다. 사실 이 사람들 중에서 처음부터 가까웠던 사람들은 많지 않다. 첫인상 픽은 아니라는 소리다. 최근 쎄함은 빅데이터이자 조상의 도움이라는 이야기를 인터넷상에서 종종 듣는다. 첫인상이 평생 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사실 첫인상이나 쎄함 같은 건 자주 정답을 가리킨다.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나에게 나중에 대한 암시를 줬다. 특히나 나는 쎄함을 느끼는 감이 좋은 편이라서 더 괜히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몇 초만에 판단한다는 건 왠지 마음이 켕기는 일이다. 내가 뭐라고 저 사람을 몇 초만에 스캔을 하나 싶어지는 순간이 많다. 마음 속으로 몇 번의 오만한 결론을 내렸다가 스스로에게 놀라 혼자 속시끄러웠던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대화는 보통 혼자서 조용히, 속으로 하는 편이다.

물론 쎄함은 자주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쎄하지 않았던 사람들, 심지어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들마저도 나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을 남겼던 적은 많다. 쎄함이 백발백중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쎄한 느낌이 언제나 문제적 상황을 만들지도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사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첫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다.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표정이나 말투마저 뚱하다. 워낙에 소극적이기도 해서 누구는 나를 보면서 속이 타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뚱함은 누군가에게는 쎄함의 감각을 자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습이 나를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몇 분쯤 대화를 나누어 보고 저 사람은 아니다, 한다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몇 초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의 첫인상이 완벽한 편은 아니니까. 첫인상이 좋다고 사람이 완벽하지도 않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거치고 나면, 쎼함이 걸러내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성격이 까탈스럽다 보니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 수많은 이유로 나를 화나게 할 수 있고,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을 싫어할 만한 수많은 이유를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거의 온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편인데, 이런 원망이 무색하게도 내가 원망하는 사람들은 정말 정상적인 사회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싫어하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온 힘을 다해 좋아한다. 내게 끔찍한 민폐를 끼쳤던 누군가는 어느 사람에게는 온 힘을 다해 의리를 지키는 친구다. 사실 이해할 생각은 없다. 쟤랑 왜 친하게 지내지? 하는 생각까지 버릴 만큼의 대인배는 못 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나도 ‘쟤랑~’의 ‘쟤’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진부한 말로, 한 사람은 한 개의 우주라고 했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소리일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복잡한 체계가 각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끼리 만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원래 복잡한 것들끼리는 잘 안 맞는다. 그런데 자주 우리는 이 복잡함을 너무 쉽게 단순한 방식으로 치환하곤 한다. 우주라는 게 중요하다. 한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은 결코 단독으로 발생한 사건일 수 없다. 사람이 싫은 데 이유가 있냐고 종종 말들을 하지만, 사실 이유는 다 있다. 다만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쎄함도 그렇다. 왜 쎄하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한다. 사실 이유를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뭔가 목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야 할 건들건들한 단어들이, 너무 복잡한 맥락들을 만나 쉽사리 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와,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해? 


한 번은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 나에게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하루 온종일 보고하는 통에 아주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재미도 없었고, 나와 대화 눈높이가 맞지도 않았다. 그럼 나는 누가 자잘한 이야기를 하는 것들을 싫어하나?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이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 난 저 인간은 나에게 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쓸데없는 스몰토크야말로 일상 대화의 진정한 재미인 것을 누가 모르겠냐는 거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뭐 그렇게 고상하고 사려깊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휴먼교수체를 따라하며 상황극이나 하지. 하지만 누구의 말은 노이로제가 되고 누구의 말은 밤새워 웃을거리가 된다. 생각해보면 왜, 로맨스 역시 스몰토크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결국 우리 모두가 알듯 같은 행동도 맥락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만큼 친해야 스몰토크가 즐거울 수 있을까? 어떤 처음 본 사람과의 스몰토크는 왜 근사한 로맨스가 되고, 왜 자주 식사를 함께 하던 친구의 스몰토크는 지치게 될까? 단순히 호감의 정도로 이걸 파악할 수 있을까? 쎄함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그래서 힘들 것이다. 쎄함의 여부 역시 그럴 것이다. 모른다는 소리다.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것이 만나면, 더 모르는 맥락이 생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지만 일단 돌다리를 두들겨 보려면 그 앞까지는 가야 한다. 그 앞까지 가서 막대든 뭐든 들고 휘둘러야 두드릴 수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일단은 만나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지간히 낯을 가리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생 피하고 숨을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알고 있다. 높은 확률로 그는 나를 돌아버리게 할 것이다. 높은 확률로 나는 그를 저주할 것이다. 하지만 낮은 확률로 나는 그를 아끼게 될 것이다. 유튜브 드라마 클립을 보다가 혐관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서로 싫어하는 관계라는 뜻이었는데 영상을 보다 보면 그러다가 항상 다들 가까운 사이가 되곤 했다. 아마 둘은 쎄하다 못해 싸했겠지. 하지만 세상 맥락이 얽힌다는 게 참 묘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판단을 뒤로 미루게 된다. 어차피 쎄하다고 피해지지도 않고 혹한다고 만나지지도 않는다.

갑자기 떠난 제주도에서, 우연히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 대화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레이더는 자주 울리는 편이지만 그만큼 자주 알람을 끈다. 후회도 자주 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다. 우주가 충돌하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 없고, 그리 쉽게 계산될 리도 없다. 이미 다들 알고 있다. 유명한 컨텐츠들의 콜라보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다들 소심하다. 게임으로 생각해 보면 온갖 기사는 다 뿌리고, 온갖 화려한 이펙트는 다 집어넣어 놓고 기껏해야 특전 아이템 혹은 특별 전투 하나쯤 추가하는 게 전부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족도야 어쨌든 콜라보레이션은 일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겁이 많아서 범퍼카를 타면 언제나 안전운전을 하곤 했다. 페달을 잘 밟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핸들을 돌려 박치기를 피했다. 하지만 한 번도 안 부딪히고 차에서 내려본 적은 없다. 충돌은 숙명이다. 별 수 없다.


마주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가도 아주 작은 한 가지가 거슬려서 정이 떨어질 수 있다. 정이 떨어지는 순간 그 전의 모든 것들이 구리게만 보인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은 뭐 그렇게 사소한 걸 가지고 트집을 잡냐고 하기도 하고. 말이야 틀리지 않았지만 시선에는 명확한 채점 기준이 없다. 서로의 맥락은 다 다르다. 종종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은 처음에는 그럴싸했지만 마지막은 질색으로 마무리되었다. 좀 징그럽고 답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로 갈라선다지만 아마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와 너무 똑같아서 갈라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대체 우리는 뭘 할 수 있냐는 거다. 백 퍼센트조차 싫고, 쎄함으로도 잡아낼 수 없고, 호감으로도 찾아낼 수 없고, 얼기설기 예측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다면 역으로 최선을 다해 달려들 뿐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지금 연락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많다. 카카오톡에 저장된 수많은 번호들이 아마 어느날 구십 몇 퍼센트쯤 사라져도 나는 삶에서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싫어진 사람들이 많다. 종종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때 했던 선택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금방 회복된다. 결국,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이, 알 수 없는 인생사의 최선인 것이다. 지금 종종 만나고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그걸로 된 일 아닌가 싶다. 영원이 이 상태에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우주가 만나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맥락은 또 이들 중 일부를 빼앗아가고 처음 보는 누군가를 소개할 것이다. 아프고 구질구질할 것이다. 토나오고 구릴 것이다. 그것도 그것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여정일 것이다. 몇 살 더 산 뒤에는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다만 동어반복적으로 최선을 다짐할 뿐이다. 언제나 온 진심을 다해서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테니. 그래야 오늘이 행복할 테니. 오늘을 좋아하려면 오늘을 좋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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