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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Jul 24. 2021

너의 체온 만큼

아름다운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진로 희망 설문에 당당하게 소설가를 적어 내던 때가 있다. 잠깐의 꿈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 기간은 꽤 길었다. 심지어 이과를 지망하던 먼 옛날에도 언젠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소설을 써서 친구들과 돌려 읽기도 했고, 자습시간에 선생님 몰래 소설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가 특히 피크였는데, 지금 글 쓰는 양을 생각하면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썼었나 싶다. 소설 쓰는 동아리의 회장이 되기도 했었고, 아무리 엉망진창인 퀄리티라지만 그 바쁜 시절에 장편을 하나 쓰기도 했었고.


그렇게 열심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손에서 놓은 계기는 좀 어처구니없다. 군대에서 책 읽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던 시절,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두 등장인물 사이에서 미세한 감정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둘 바깥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설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글들을 읽은 경험이나 압도적인 능력의 차이를 느꼈던 순간들은 적지 않았지만 유독 그 소설을 읽고서 느낀 절망감은 각별했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소설은 그런 사람의 몫 같았다.


세상에는 뛰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서점에 가면, 혹은 인터넷에서 스크롤을 조금만 내려 보면 멋진 글들이 넘쳐났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그럴 수 없다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뒤로 한동안은 마음을 내려놓고 콘텐츠의 즐거운 소비자로 지냈다. 순수한 소비자의 입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뛰어난 것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그저 좋았다. 내가 만든 것들의 꼴을 보고 착잡할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면 애초에 장래희망에 소설가 같은 걸 적어내는 일은 없었겠지. 텍스트를 써내는 건 내게는 꼭 숨 쉬는 일 같았다. 습관 이전의 문제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서 글 쓰는 일에 완전히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나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다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로 쓴 글들이 소설은 아니었지만 숨을 쉬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글을 다시 쓰게 되었기에 이전의 그 고민들은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뛰어난 작가들이 너무 많았고, 나는 확실히 그들만큼 뛰어나진 않았다.

나는 더 나아지고 싶었다. 뛰어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만족스러울 만큼 해내지 못한다는 것도 참기 힘들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은 간절하다. 하지만 방법론이 문제였다. 과연 나는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생각했다.



종종 사진을 어떻게 잘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정의하고, 닮아가고, 나아지는 과정에 대해서 말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내용물은 간단하다. 우선 ‘잘 찍은 사진’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해야 한다. 잘 찍은 사진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구체적이지 않은 데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잘 찍은 사진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본인이 생각하기에 잘 찍은 사진들을 찾고, 그 후 그것들을 잘 찍은 사진이라 정의하라고 말했다. 자, 그럼 정의. 다음은 닮아가는 과정이었다. 어떤 사진을 닮은 최종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진들이 왜 잘 찍었다고 생각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그건 구도의 활용일 수도, 색깔의 조합일 수도, 순간의 포착일 수도 있다. 그 방법을 계속 생각하며 내 사진과 그 ‘잘 찍은’ 사진을 닮아가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더 말할 게 있나? 그 방법론을 바탕으로 더 나아지는 것.


글에서도 마찬가지의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못할 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럼 이제 첫 번째 문제를 풀어볼 차례였다. 과연 내가 닮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이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잘 쓴 글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 탁월한 것들 사이에서 닮고 싶은 것을 엄밀하게 골라내는 것은 어찌 보면 고통스러운 일이다. 닮고 싶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멋진 글이면 다 닮고 싶지 뭐.


고민을 거듭하다 내가 그간 잘 쓴 글들을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나는 멋진 글, 하나는 아름다운 글. 어느 쪽을 닮고 싶으냐 물어본다면, 아름다운 것들 쪽이었다. 그런 글들은 정말, 문득 튀어나왔다. 책을 펼치며 본 것들도 있고, 책 바깥에서 본 것들도 있었다. 확실한 건, 내가 그것들을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확신했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글들은 너무 인상깊어서 지금이라도 줄줄 읊어볼 수 있다. 임지은 작가의 ‘연중무휴의 사랑’에 등장한 첫 번째 글(나는 이 글을 읽자마자 내가 이 책을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리스팅해놓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이나, 한승혜 작가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거나, 박선아 작가가 학창시절의 풋사랑에 대해 썼던 글이라거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라든가, 심너울 작가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에 실린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라거나. 뭐 그런 것들. 아, 정대건 작가의 ‘GV 빌런 고태경’ 도 책꽂이에서 눈에 띈다. 아무튼 뭐 그런 것들. 나는 그 글들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해서 내가 ‘멋지다’보다도 ‘아름답다’를 생각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름다운 글들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글들은 마음이 평온해질 만큼 잔잔했고, 어떤 글들은 계속해서 웃음이 나는 위트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글들은 화려했고 어떤 글들은 아주 조용했다. 물론 모두 아주 잘 쓴 글들이라는 최소한의 공통점은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건 멋진 글들 역시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그래, 기술적인 범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일단 알겠다. 그래서 기술 바깥의 것들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어라, 시선? 


결국은 시선이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글들의 가장 가시적인 공통점이라면 그들이 구체적인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에 대해서 다루는 글은 그 온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뜨거우면 그 글이 부담스럽고 너무 차가우면 그 글에 정이 떨어진다. 사람에 대해 다루려면 결국 그가 가진 결점에 대해서도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다루는 글은 딱 체온만큼의 온도가 좋은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결점이 있다. 너무 완벽하다면 너무 완벽하다는 사실이 결점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너무 뜨거운 사랑의 시선은 그 결점을 억지로 무시하는 것만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차가운 시선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걸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사람 만큼의 온기가 있는 시선이란, 음, 뭐랄까, 그 중간에 서 있다. 모든 사람이 결점, 혹은 한계를 내포함을 인정하는 한편, 그것을 너무 매정하게 바라보지만은 않는 것. 그와 동시에 체념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 말은 쉽지만 사람은 너무 까탈스럽거나 대책 없는 존재라서 직접 해보면 그게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 온도를 가지고 나와 다른 결점을 가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글. 그런 눈빛이라니! 나는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 같다.


저 아름다움이 어려운 이유는 저것이 무작정의 중용으로는 닿지 못할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가끔 멋지긴 하지만 뭐랄까, 저게 되면 그 사람은 초인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은 글들이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문제를 감내하면서 지속해 나가는 꿋꿋함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대형 세단이 풀 악셀을 밟고 질주하는 걸 난 꿋꿋함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에라 모르겠다, 꺼져라, 이것도 너무 체념적이고. 꿋꿋이 사랑하되, 해탈하지는 않는 것. 그런 시선. 뭐랄까, 누군가를 부처님이라 부르는 것과, 사랑의 천재라고 부르는 건 다르니까. 나는 사랑의 천재들이 좋다.



음, 정의를 내려놓고 나니 더 막막해졌다. 내가 무작정 사람에 대해 다룬다고 해서 저 아름다움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조악한 짝퉁 정도나 되면 다행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 아름답게 글을 쓸 수 없다. 그 사람만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사랑할 만한 점이나, 그 사람의 결점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까. 결국은 특유의 시선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도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거겠지. 더 많은 데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배우고, 느끼고, 함께하고.

그러다 보면 나 자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뭐, 그래야지 별 수 없었다. 예전에 친구(나는 이 친구가 위에서 말한 사랑의 천재라고 생각한다)가 이상형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한참 대화하다가, 최선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 스스로가 그 이상형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랑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간에, 아름다운 글도 그런 거겠거니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분주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언젠가는 아름다운 글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내기 때에는 꼭 들어보고 싶었던 수업인 소설창작연습을 결국 듣지 않고 마지막 학기를 마쳤다. 그러고 나니 괜히 미련이 남는다. 오랜만에 단편을 쓰고 싶은 기분이다. 뭐가 됐든, 분주히 쓰기로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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