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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y 09. 2022

감자튀김은 무적이고 테드 창은 천재다

눅눅해지고서야 비로소!


어린 시절의 나는 소문난 다독가였다. 그리고 오늘 출근길에 읽은 보르헤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방금 쓴 문장은 신념에 의거한 발언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적 읽은 책들이 많이 남아 있고 어쨌든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는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런 기억들은 엄마가 ‘너는 책을 정말 싫어했어.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 나잖아.’ 하고 말한다면 그렇구나, 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이나 희미하다. 


어린이집 놀이 시간에 다른 걸 다 제치고 책을 읽었다는 증언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인상을 쓰고 생각해보건대 가물가물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뛰어다니면서 노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나의 사회성이 그 증거다. 때문에 다독의 근거로 채택되기 어렵다.


일곱살 때 책에서 읽은 내용을 근거로 세종대왕반 친구들과 말싸움을 벌였던 기억도 있긴 하다. 이건 상당히 선명한 기억인데 왜냐면 그 때 싸웠던 친구 중 하나와 같은 초등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가을과 겨울을 가르는 기준이 눈이 오는가의 여부라고 주장했고 나는 책에서 읽었는데 눈이 오지 않더라도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따라 계절이 바뀐다고 응수했다. 그리고 태양계의 행성에 대한 주제들로도 싸웠다. 뭘로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반박을 하자 그 친구는 ‘책에는 전부 지어낸 이야기 뿐인데 멍청하게 그걸 믿냐’고 했다는 건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옳았다는 것도. 아주 지구과학 꿈나무였네. 어쨌든 이 싸움 역시 내가 책을 좋아해서라기보단 6살의 내가 키보드 위에서 싸우는 법을 아직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0대의 전투 기록들이 그 증거다. 때문에 이 역시 다독의 근거로 채택되기 어렵다.


어쨌든 근거 없는 신념에 따르면, 나는 많은 명작을 읽기는 했다고 전해진다. 세계문학어쩌구집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고, 한국 문학 역시 다양하게 읽었다고 하며, 논픽션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릴 때 축약본을 읽은 것을 독서로 쳐야 하는가에 대한 양심상의 발언이었으나 며칠 전 세계문학을 탄탄히 섭렵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사실을 서술하는 발언인 것으로 위치가 재조정되었다. (보들레르와 보르헤스를 헷갈린 내가 문학을 전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깊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에 저런 내용의 텍스트가 존재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만 생겼다.


며칠 전의 대화에서는 테드 창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테드 창의 단편집을 아주 감명깊게 읽은 바가 있어서 신나게 말을 거들었는데, 깊숙하게 이야기하려고 보니 내가 그걸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드 창 단편집을 읽은 건 2017년. 스물 두 살때의 일이다. 그렇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 읽은 책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살면서 읽은 최고의 단편 중 하나로 꼽는 글인데도. 이러다 몇 년 뒤에는 내가 김초엽의 단편도 까먹었다고 말할 것만 같아 무서웠다.


제주도 애월쪽에 위치한 골목책방 아베끄.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를 구매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책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건 그게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스물 두 살때 읽은 책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스물 네 살에 읽은 책 역시 완벽히 기억할 수 없고, 스물 여섯에 읽은 책도 가물가물하다. 스물 일곱에 읽은 책은 다행히 현재 스물 일곱인 관계로 얼추 회상이 가능하다. 어린 시절은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난 뭘 했던 걸까? 책을 읽은 게 아니라 페이지 넘기는 행위를 반복한 것에 불과한가?


나약한 기억력에 대해 반성하며 어제는 테드 창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의 단편선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작품은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작품인데, 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에 대한 질문을 인상깊게 던지고 또 묘사해낸 작품으로 기억한다. 이 말을 꽤 자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만 하고 머릿속에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의 내용과 헷갈려하며 유아인이 나온 장면을 소설의 한 장면처럼 소개하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아무튼 그걸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굉장한 작품이었다. 읽으면서 마음이 막 황홀해졌다. 그냥 짧게 말하면 되는 걸 왜 소설같은 걸 쓰냐고 질문을 던지곤 하는 학생들을 이 책을 휘두르며 회개시키고 싶었다. 소설의 존재 이유 같은 책이다. 인간 존재의 의의에 대한 화두를 이 작품만큼 깊게 던질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감격한 마음을 부여잡고 책 뒤편에 번역가와 작가의 대담이 실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 그 대담을 읽었다. ‘지옥은 신의 부재’만 읽고 독서를 마칠 작정이었지만 마음이 또 황홀해져 단편집의 맨 처음에 실려 있는 작품인 ‘바빌론의 탑’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다 읽고 나니 그의 위대한 작품세계에 또 가슴이 벅차올라 책장에서 ‘숨’ (테드 창을 사랑하는 사람 기믹을 유지하기 위해 출간되자마자 사놓고 지금껏 읽지 않았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나보다 그 책을 먼저 읽었다.)을 꺼내들고 첫 번째 단편을 읽었다. 아니, 이렇게 굉장한 작품을 왜 아직 안 읽었을까? 하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첫 단편의 절반쯤 읽었을 때쯤 운동을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주말에 보르헤스와 보들레르를 헷갈린 과오도 반성하기 위해 그의 전집 중 한 권인 ‘픽션들’의 민음사 판본을 리디북스에서 사 읽었다. 단편을 세 개 정도 읽고 나니 그는 소설 속에서 완전한 대안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창작했는지 알고 싶어 오후 출근길에 보르헤스의 생전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테드 창이 인터뷰를 했다면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불현듯 받았다. 주로 사용하는 소재나 모티브, 언어학에 대한 관심, 앞을 보지 못함에 대한 메타포(보르헤스에게는 메타포가 아니긴 했지만.) 등이 그랬다. 곧바로 네이버에 보르헤스 테드 창을 검색해본 결과 테드 창이 보르헤스의 계승자, SF 장르의 보르헤스라는 평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느낀 희열이란! 이 경험을 전했더니 움베르토 에코 역시 보르헤스의 계보에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 그렇네! 또 다시 밀려오는 희열!


스물 두 살때 테드 창의 단편을 읽으며 분명 굉장한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그 때의 흥분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도 같다. 공사장에 파견 근무를 가서, 3월의 으슬으슬한 추위를 버티며, 서서 그걸 읽었다. 중간중간에 통역을 해달라는 요청에 응하고, 서둘러 일을 처리하고 다시 돌아와 책을 읽었다.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텍스트를 잘 읽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런 것도 무시하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만큼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내가 같은 작품을 가지고 어제오늘 겪은 걸 경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었더라도, 오늘의 것을 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모든 음식이 살짝 식은 것처럼 느껴졌다. 음식이 가진 특유의 풍미가 덜 느껴져서 짠 맛과 매운 맛만 부각되었다. 몸은 힘든데 맛있는 건 백 퍼센트 느낄 수 없어서 억울한 마음, 과자는 한 줄기 빛이었다. 과자는 원래 미지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자에는 미지근한 온도가 가장 잘 어울린다. 건조된 음식들의 특징이다. 어떤 온도든 버틸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음식들이 가장 맛없는 미지근함에서도 그 맛을 유지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본분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는 쪽이 맞겠다.


마르지 않은 음식은 빠르게 변질된다. 수분의 존재는 부패를 의미하며 온도의 변화는 음식의 풍미를 죽인다. 만들어낸 순간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 마르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씩 부스러져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조하게 암기한 사실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군대에서 배운 몇 가지 줄글들을 외울 수 있다. 신앙심 없이 외운 주기도문이나 찬송가의 가사 역시 능숙하게 주절거릴 수 있다. 아니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공부할 때 외웠던 것들이라든가. 그것들은 테드 창의 작품보다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다. 복무 신조, 우리의 결의.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나는 어제 읽은 ‘지옥은 신의 부재’가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육군 복무 신조를 감자칩보다 더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에서 회복하고 음식의 풍미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내가 남은 평생 느낄 수 있는 맛의 최상치가 포카칩 오리지널이었다면 나는 많이 슬펐을 것이다. 좋아하긴 하지만서도. 건조 음식인 라면에 굳이 물을 부어 끓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읽은 순간의 어떤 기억. 이 기쁨. 아마 며칠이 지나면 또 가물가물해지겠지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호들갑을 떨었던 기록만이 이 감정을 증명하겠지만 이 휘발성은 이 감정에 수분이 들어있음을 증명한다. 수분은 풍성한 맛을 만든다. 내가 테드 창의 단편집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웠다면, 오늘의 일은 없었겠지.


어린 시절의 내가 정말로 책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내 선택지에 어쨌든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일단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으면 컴퓨터 게임을 하는 쪽이었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플래쉬 게임을 좋아했다. 일곱 살쯤 먹고부터는 엄마 몰래 온라인 MMORPG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동기야 어찌 되었든 내가 유치원에서 읽었던 책들에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거다. 진심을 다해 신기해했고 진심을 다해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책 이야기를 같이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슬프기도 했다. (헐 그래서 국문과를 갔나? 책 읽지 말걸. 수학을 할걸.) 물론 그 마음의 방출 형태가 원초적 형태의 말싸움이었다는 사실은 좀 싹수가 노랗지만.


어쨌든 잊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잊었다는 것은 내가 그 독서의 순간을 온전한 풍미와 함께 즐겼다는 증명이니까. 그러니까, 망각 자체가 그 향유의 증명이 되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풍미는 사라지겠지만, 다시 구미가 당길 때 한 번 더 읽지 뭐.


같은 책을 여러 번 읽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걸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다. 같은 음악을 여러 번 듣는 것조차 그랬다. 언제나 나는 전곡 랜덤 재생을 돌려놓고 살았다. 요즘은 같은 곡을 여러 번씩 반복 재생을 한다. 동생이 내가 듣는 노래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읽음이 굉장한 경험으로 나를 이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굉장한 일이다. 좋아한다고 말한 책들을 다시 읽어야지. 좋아한다고 말한 영화들을 다시 봐야지. 


나 외의 전인류와 마찬가지로, 갓 나온 감자튀김이 너무 좋다. 감자칩은 이걸 이길 수 없다. 가끔 맥도날드에 들어가 감자튀김만 만 원 어치 사먹고 나오는 상상을 한다. 아직 시도는 못 해봤다. 그러나 소금과 기름과 감자, 그리고 금새 들어간 약간의 눅눅함이 짜릿할 것이란 사실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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