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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May 10. 2022

한낮의 건대입구역에 가본 적 있나요?

버스에서 내리면 어떤 곳이 있을까


요즘 내가 일을 돕고 있는 친구는 종종 퇴근길에 나를 택시에 태워 보내준다. 의정부에서 목동/대치까지 출근하는 나에 대한 배려다. 밤중에 지하철을 타고 의정부까지 돌아가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호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만 돌아가는 그 길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일단 친구가 기꺼이 지불한 강남에서 의정부까지의 택시비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건, 난 멀미가 좀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택시에서 내린 뒤 친구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한 마디를 덧붙인 날이 있다. 다음 주부터는 내가 멀미약을 먹고 출근할게. 유독 멀미를 심하게 한 날이었고,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날이었다. 제주도에서 버스든 택시든 자주 탈 텐데 탈 때마다 이런 식이어서는 여행이 내내 울렁거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똑같이 멀미가 심한 내 동생에게 멀미약을 세 병 얻어 캐리어에 넣었다.


사는 곳의 문제로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편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써볼 수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하는 것 역시 내가 대중교통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 중 하나다. 보통은 아이패드를 꺼내 책을 읽는다. 다만 지하철에선 그게 되는데 버스에선 그게 어렵다. 예전에 안암에서 학동역으로 출근할 적에 버스를 꽤 오래 탔는데 그 시간동안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게 늘 아까웠다. 용기를 내서 독서를 시도해봤지만 사무실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메슥거리는 느낌이 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읽었던 책도 기억이 난다. 신유진 작가의 열다섯 번의 밤. 참 찹찹한 분위기의 책이었지만 멀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마음이 몸을 이긴다는 건 내가 경험한 선에선 거짓말이다.


어쨌든, 제주도에서 나는 아침마다 멀미약을 먹었고 그래서 자신만만했다. 이번 제주 여행의 셋째 날은 나 혼자 떠도는 날이었는데 공항 인근에서 애월까지 가야 했으므로 짧지 않은 버스 탑승으로 일정이 시작되었다. 마침 앉을 자리도 꽤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항상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만만하게 아이패드를 꺼내들어 밀리의 서재 어플을 열고 책을 읽었다. 좋아하는 에세이스트들이 여럿 참여한 가벼운 책인 ‘요즘 사는 맛’. (대중교통에서는 가벼운 책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는 미묘한 강박이 있다.) 목적에 맞게 페이지는 가볍게 넘어갔다. 김혼비 작가, 디에디트, 그리고 …


그쯤에서 창 밖이 보였던 것 같다. 그 날은 날씨가 여러 모로 완벽했어서. 하늘이 쾌청한 파란색이었다. 아직 유채꽃이 지지 않았고, 밭에는 초록이 무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홀린 듯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느 신호등 앞에서 버스가 멈춰섰다. 길 옆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 양 옆에 벚꽃나무가 서 있었고. 책을 읽겠답시고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이런 장면은 놓치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허겁지겁 카메라를 꺼내고 (이 과정에서 렌즈캡을 두 번이나 떨어뜨렸다) 사진을 찍었고,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셔터를 누르기로 마음먹었고, 셔터스피드를 한껏 올렸고,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쉬지 않고 셔터를 눌렀고, 너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다.


이 사진이 얼마나 찰떡콩떡이냐면, 내가 너무 좋아하는 제주도 사진작가님이 이 스팟을 정확히 찍어 스토리에 올리셨다. 그 사진보다도 내가 찍은 이 사진이 좋았다.


그러고 나니까 아이패드에 다시 시선이 가지 않았다. 나는 계속 창가만 바라봤다. 기껏 마신 멀미약이 무색했다. 생각해 보면, 버스에서 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나면 버스에서 무작정 내려 사진을 잔뜩 찍는 게 그거였다. 아직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왜 항상 내 목적지 주변은 황량하고 가는 길은 그렇게 흥미로워 보이는 게 많은지. 당산 철교는 그렇게 아름다운데 내가 내리는 학동역에는 온통 회사 빌딩 뿐인지.


한 번쯤은 버스에서 무작정 내려볼 수 있을 법도 한데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석양이 지는 뚝섬역을 지나갈 때마다 얼마나 마음에 갈등이 심하게 생겼는지 모른다.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런 건 정해진 루틴에 맞지 않았고 계획에 그런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여행을 떠나서도 미리 짜 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나를 상대로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저항은 기껏해야 버스 창문을 열고 셔터를 분주히 누르는 것 정도.


사실 나는 완벽히 계획대로 그 날의 일정을 마쳤다. 계획과 달라진 거라곤 웨이팅이 있어 보였던 카페 대신 근처의 다른 카페에 들어간 것 정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삶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좋은 여행이었다. 멋진 사진들을 많이 찍었고 좋은 책도 읽었다. 심지어 버스 안에서. 미리 챙긴 멀미약 덕분에 멀미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저기’서 무작정 내리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계속, 계속, 계속 든다. 어떤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버스 창가 넘어서 유채꽃밭이 보였다. 그 주변에는 녹색의 풀밭이 있었고 멀리에는 한라산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 날보다 완벽하기는 어려웠다.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삶은 아주 말끔하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나는 꽉 짜여진 삶이 오히려 그런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안다. 그건 각설탕으로 쌓은 이글루 같은 거다. 계획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아주 취약하게 무너져 버린다. 나는 황망하게 거리를 걷다가 도망치듯 다시 집으로 돌아온 기억들이 많다. 아니면 살짝 나사가 풀린 채로 무작정 직진하다 간 길 그대로 돌아오거나. 


너그럽게 생각해서 계획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자. 어쩌다 이글루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음, 대체 각설탕으로 쌓은 이글루에 무슨 의미가 있지? 너 각설탕으로 재미있는 걸 만드는구나? 하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내 다이어리나 캘린더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대충 그렇다. 


사실 각설탕은 에스프레소에 넣는 게 가장 좋다. 이글루를 쌓으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다. 내 캘린더는 이미 5월 초까지 꽉 짜여 있고 그 일정은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저걸 짜놓은 게 3월초순이란 것 정도. 모든 주말이 계획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일정을 쉬이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다이어리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글루를 쌓겠답시고 커피에 넣을 설탕이 없으면 뒤통수 씨게 쳐야지. 뭘 그걸 좋다고 쓰다듬고 있어.


다이어리에 일정이 적히지 않은 채로는 나는 그냥 아주 불안한 사람이다. 명분과 계획의 세계. 당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상대로 겨우겨우 명분을 찾아내 2주 뒤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건넨다. 종종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정작 당장 내일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집어먹는 나의 기준이긴 하지만.) 한두 번쯤은 버스에서 내릴 수도 있을 텐데.


건대입구역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촬영 장소다.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를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그 동네에서 찍었었다. 당연히 밤에 거기를 갈 생각은 없고 항상 낮에 간다. 평일 낮 건대입구역 뒷골목은 아주 조용한 주택가가 된다. 빛이 잘 드는 날이면 햇빛이 고요하고 느리게 골목을 채우고, 그 분위기는 망원동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사실 사진을 찍으러 사람들이 자주 오는 동네는 아니다. 특히 낮 사진은. 이 동네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필름카메라 수리점이 있다기에 찾아갔고, 지하철 역에서 나와 복잡한 골목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는데 동네가 예뻤다. 다음에 이 동네에 와서 사진을 찍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럼에도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는 건, 하차에 대한 멀미는 약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멀미약을 먹고, 버스에서 책을 읽다, 창밖을 보며 생각했었다. 음, 설탕을 네 스푼 넣은 커피를 마셔 봐야지. 가는 길에 뚝섬 유원지가 있으면 내려 봐야지. 이유 없이 걸어 봐야지. 친구에게 시덥잖은 이야기로 말을 걸고 약속을 잡아야지. 날짜는 이틀 정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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