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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Jul 20. 2017

여행자의 가방 _ 제주올레 14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그토록 반짝이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길가에 꽃들이 그토록 많은 줄도 예전엔 정말 몰랐다. 물탱크도 지붕 위의 타이어도, 나무를 감고 타고 올라가는 콩난도. 길을 걸으며 보는 모든 것들이 새롭다.


비로소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홀로 여행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앞만 보던 눈은 위로 아래로 옆으로 향한다.

세상이 다시 보였다 할까. 지금까지 뭘 보면서 살았는지 억울할 정도다.


길에서 나에게 올레길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이제 여행자로 보이는 걸까. 나는 아주 친절하게-마음 같아선 약도라도 그려주고 싶었지만-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었다.

마을을 지날 때 어르신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건 여쭤 보았다. 버스 정류장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제주의 시골 어르신들은 농사일을 멈추고 길을 걷는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곤 언제나 혼자 걷는 나를 걱정해 주셔서 오히려 내가 안심을 시켜드려야 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여행 가방 안에 캐러멜과 사탕을 챙겨 가지고 다녔다. 길에서 만나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드리기 위해.

구운 오징어 다리도 챙겼다. 제주에는 순한 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개에게 오징어는 좋지 않은 음식이란 걸 어디서 듣고 멸치로 바꿨다.




내 여행 가방 안에는 달달한 간식과 비린내 나는 멸치로 종잡을 수 없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냄새가 깊어갈수록 나는 점점 여행자가 되어갔다.  


J는 내 여행이 절반이 넘은 걸 알고 혼자 다니게 한 것이 미안했는지 14코스를 같이 걷자 한다. 그럼 절반만 같이 걷자 했다. 모처럼 주말인데 늦잠을 자게 하고 싶어서.

그 절반의 길에서 기다릴 J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고 세상 모든 것들이 정겨웠다.


J를 만나기로 한 지점은 월령 마을 선인장 자생지였다. 먼 멕시코에서 씨앗이 날아와 큰 규모의 선인장 군락지를 이루었는데 우리나라에선 제주만이 자생지란다.

선인장이 바닷가에서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처음 보았다. 해당화도 해초도 아닌 삐죽빼죽한 선인장이 돌에서 자란다.


저 멀리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얀 풍차와 그 아래 벽화가 그려진 집은 이국적이면서도 따뜻한 풍경이었다.

바다는 프러시안 블루와 프탈로 그린.

정자 아래 앉아 그림을 그렸다.










14코스의 두 번째 그림은 에메랄드 빛이 반짝이는 금능과 협재.

바다는 아름다운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쳐 걷는데 바다를 향해 바짝 마주 앉은 노란 집이 눈에 띄었다.

집 앞은 바다, 수평선의 비양도가 노란 집을 마주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작은 집, 바다와 비양도를 마주한 그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4코스를 걸으며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도 처음 보았다. 보석 알갱이보다 더 맑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방울.


올레길을 걸으면서 처음 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혹시, 내가 처음이라 생각한 것들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 안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있던 무감각과 무심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내 여행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나는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






제주올레 14코스 월령리 선인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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