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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30. 2017

쉴 만한 의자 _ 제주올레 13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5

  10코스부터 끝없이 펼쳐진 마늘 밭, 그 많고 많던 마늘들이 일제히 뽑혀 밭담 위에 널려있다. 길을 걷는 내내 초록 물결 속에서 넘실대던 알싸한 마늘 향을 맡았는데 오늘은 황무지다. 

  늦봄은 마늘 수확 시기다. 농사와는 한참 먼 삶을 살아와서 이런 풍경이 낯설다. 마늘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좋아하는 반찬 마늘종을 어떻게 따는지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걷기 여행을 하니 자연은 막연한 동경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살아 있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올레 13코스는 중산간 깊은 자락을 걷는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하는 데다 배차 간격도 커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길다. 인적 없는 낯선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버스 시간만 잘 맞추면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려면 여행이 타이트해진다. 나는 천천히 걷는 데다 툭하면 멈추거나 마음에 드는 곳에선 그림까지 그리니 시간에 쫓겨서는 제대로 여행할 수가 없다. 오늘은 집에서 일찍 나와 다른 코스보다 이른 시간에 걷기 시작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큰 도로를 건너자 조용하고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동화에서 봇 듯한 작은 건물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다. 호기심에 교회당 문 손잡이를  살짝 비틀어보니 문이 열린다. 서너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공간에 시원한 마루가 깔려 있다. 정면에는 단상이 놓였고 단상 뒤에는 큰 창이 나있다. 창으로 부드러운 빛이 들어와 펼쳐져 있는 성경책 위에 내려앉았다. 내 마음 결도 잔잔해지는 듯하다. 그대로 앉아서 잠시 머물고 싶지만 함부로 들어가서도 안 되고 갈 길이 멀어 서둘러 나왔다.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 용수 저수지를 지난다. 저수지 물이 찰랑찰랑 넘칠 것만 같다. 제주에선 이렇게 가득히 고여있는 민물이 귀하다.  바다는 넘치고 넘쳐나지만.  

  고목 숲에 들어가니 곶자왈에서 본 양치식물들이 보인다. 마르고 키 큰 나무를 덩굴식물이 칭칭 감고 타고 올라간다. 나무는 답답하겠지만 보는 나는 신비롭다. 비밀의 숲이란 이런 곳이 아닐까.


  숲을 거의 다 빠져나올 무렵 옛날 공중전화 박스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간이 가판대 같은데 공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행복 쉼팡'이다. 이 마을 청년회에서 길을 지나는 올레꾼과 여행객을 위해 마련해 놓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는 작은 주전자가 올려져 있고 종이컵과 커피, 차가 준비되었다. 한쪽 벽에는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감사 메시지가 빼곡히 붙어있다. 소박한 공간이지만 마을을 지나는 낯선 객을 위한 이 마을 청년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낯선 이에게 차 한 잔 건네고 싶은 마음을 나도 받고 싶다.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어 앉았더니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웃음이 났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의자에 균형을 잡고 앉아 쉬는 김에 도시락을 먹었다. 조용한 숲에서 밥을 먹고 마을 청년들이 마련한 커피를 조심조심 타서 마신 후 감사의 편지를 남겼다.


  행복 쉼팡이 있는 조수리를 지나 의자 마을로 유명한 낙천리로 들어섰다. 원래 낙천리는 제주의 다른 마을과 달리 여행객의 발길을 끌만한 것이 없었다. 바닷가도 아니고 멋진 오름이나 숲도 있지 않은 그저 밋밋한 시골 동네였다. 그러던 마을이 어느 날부터 관광객으로 들끓게 되었다. 수백수천 개의 의자 때문이다.

  낙천리 사람들이 만든 의자는 단순히 의자 본연의 임무를 띤 의자가 아니고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의자에는 재미있는 이름까지 붙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성으로 낙천리는 널리 알려져 TV에도 나오는 등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다.

  의자 마을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의자 마을이라니. 신기하지 않나. 하지만 실제로 본 의자 마을은 상상과 달랐다. 나는 의자 마을이라 해서 제주 특유의 돌담을 두른 지붕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여기저기에 의자가 자연스럽게 놓였는 줄 알았다.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 그림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유명한 의자들은 잘 조성해 놓은 공원에 전시품처럼 놓여 있었다. 의자 마을이 아니라 의자 공원인 셈이다. 각양각색의 많기도 많은 기상천외한 의자들. 하지만 그곳의 의자들은 어쩐지 작품에 가까워 앉기가 꺼려졌다.  

  행복한 의자는 어떠 의자일까. 아주 편안해서 낯선 마을도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의자. 날 위해 준비한 의자, 내가 앉기를 바라며 기다리던 의자는 좀 전에 지나쳐 왔던 조수리 행복 쉼팡의 한 쪽이 기울어진 그 낡은 의자였다. 그 의자에서 나는 도시락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짧은 편지도 썼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누군지 모르는 상대에게 따뜻한 정을 느끼고 감사의 편지를 남긴 건 처음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빛나는 영감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친절이다.

  의자 공원에서는 한적하게 떨어진 시원한 정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내 그림 속 의자 이름은 '행복 의자'다.




 

낙천리 의자 마을, 올레 13코스를 걸으며  






  의자 공원 뒷마당으로 올레길이 이어진다. 탁 트인 풍경 속에 청보리 밭이 펼쳐졌다. 밭 사잇길로 돌담을 쌓았다. 구불구불한 돌담 길은 숲을 향한다. 반듯하고 튼튼하게 쌓아놓은 돌담이 어찌나 멋들어진지 돌담을 밟고 걷고 싶을 정도다. 상상 속에 그리던 올레길의 모습이다. 이런 길을 걷고 싶었다. 드넓은 초원으로 난 구불구불 좁은 길, 돌담과 바람.

  새순 같던 청보리는 살짝 익어서 군데군데 노란빛이 보인다. 상냥한 봄바람이 불어 보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사사삭 소리가 난다. 






잣길, 올레 13코스를 걸으며





  그 길에도 의자가 놓였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들이다. 어떤 의자는 햇빛을 받아 색이 바랬고 어떤 의자는 이끼 낀 얼룩으로 덮였다. 마치 의자 공원에 전시되어 있던 의자가 낡고 고장이 나 더 이상 쓸모 없어져 이곳에 버려진 것 같다.

  마침내 내가 보고 싶었던 의자 마을의 풍경을 발견했다. 쉬었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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