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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29. 2017

길을 묻지 않는다 _ 제주올레 12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4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내일의 날씨를 확인한다. 육지에 살았을 때는 비 오는 날도 좋아했지만 제주에서는 무조건 화창한 날이 좋다. 제주는 바람 불고 비가 오는 흐린 날이 많아서 파란 하늘을 보면 날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들뜨고 설렌다. 걷기 여행을 하는 요즘은 특히 더 파란 하늘에 감사하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오다 맑은 날이 찾아온 오늘은 '절벽과 하늘을 걷는 최고의 바당길'인 올레 12코스를 걸었다. 

  시작부터 11코스에서 줄곧 보았던 마늘 밭을 걷다 인적이 드문 신도 마을로 들어서 녹남봉에 올랐다. 올레길을 걸으며 오름을 몇 개나 오르다 보니 이제는 오름마다 비교가 된다. 녹남봉처럼 밋밋한 오름도 정상에서 보는 풍경만큼은 한결같이 멋지다. 도시락을 먹으며 저 아래 내가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참 많이도 걸었다. 12코스까지 걸었으니 올레길의 절반을 걸은 셈이다. 1코스를 걸을 때만 해도 완주는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한 코스 한 코스를 충분히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길을 걸을 때도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는 편이지 도착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걷고 있는 이 한 걸음이 아닌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떠올리는 건 어리석다. 나는 도착하려고 걷는 것이 아니라 걷기, 그 자체를 위해 걷는다.

  동쪽에서 시작한 걸음은 남쪽을 다 걷고 이제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도는 일이 나에게 가당키나 하나.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이 길을 왜 걷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모든 행위에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를 개조해 도자기 공방으로 꾸며 놓은 산경 도예를 지나 다시 마늘 밭 사잇길을 걸으니 바다가 보인다. 용암이 만들어낸 크고 작은 도구리를 볼 수 있는 도구리 해안이다. 내륙을 한참 걸었더니 바다가 보고 싶은 참이었다.

  도구리는 함지박의 제주어다. 바위가 둥그렇게 파인 도구리 안으로 파도에 물고기와 문어가 휩쓸려온다니 자연 친화적인 고기잡이 방법이다. 올레길을 안내하는 스탠드에 두 갈래 길이 표시되었다. 도구리 해안도로를 에둘러 가거나 울퉁불퉁한 돌을 밟는 바닷가 지름길. 당연히 바닷가를 택했다. 도구리에 갇힌 물고기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올레길을 걸으며 돌길을 한두 번 걸은 것도 아닌데 미끄러운 돌에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졌다. 운동화에 양말까지 푹 젖었다. 올레길에서 생긴 첫 사고다. 한 발만 빠진 게 그나마 다행이랄 수밖에. 편의점도 없는 시골 마을이라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질퍽질퍽한 신발로 엉거주춤 걷자니 어쩐지 좀 서러웠다. 거리엔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는 이 뜨거운 날에 나는 왜 이런 꼴을 하고 걷고 있나. 미끄러진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 돌밭을 그리 빨리 걸었으니. 좀 걸었다고 그새 자만한 거다.


  길은 수월봉으로 이어졌다. 우리 외할머니 이름이라 반가운 오름이다. 정상에 오르니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정자에 앉아 양말을 벗었다. 햇빛을 받아 뜨끈뜨끈해진 돌계단에 양말을 펼쳐 놓았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계속 길을 걸어야 하니. 한쪽 발만 맨발을 한 채 눈앞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물빛이 유난히 파랗다.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차귀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양말이 마를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다. 구름 모양이 바뀌는 걸 보고 차귀도를 오가는 배가 몇 척이나 되는지 세어 보았다. 옛날엔 차귀도에 사람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무인도다. 언젠가 저 섬에도 들어가 봐야지.



차귀도가 보이는 수월봉에서, 오레 12코스를 걸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수월봉을 내려가니 화산 쇄설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펼쳐져 있다. 엉앙길이다. 엉앙은 제주어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이곳의 화산 쇄설암은 겹겹이 쌓인 줄무늬로 이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지질학적인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용머리 해안과 송악산에 이어 또 한 번 제주의 화산 폭발이 만들어낸 지질에 놀랐다.  

  엉앙길 입구에서 수월봉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벌레 한 마리가 꼬물꼬물 기어간다. 전에는 벌레만 보면 화들짝 놀랐는데 웬일인지 이 벌레는 귀엽다.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벌레 옆에 내려놓았더니 벌레가 스케치북을 타고 올라가 그림 속 수월봉에서 멈춰 꼼짝도 않는다. 마음에 든 거니?



수월봉, 올레 12코스를 걸으며


  


  물결 문양으로 겹겹이 쌓인 화산 쇄설암 절벽과 햇빛에 반짝이는 바닷길 사이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조금씩 달리 보이는 차귀도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걸음이 아쉬운 길이다. 길은 당산봉으로 이어지고 이번에는 생이 기정 바당길이다. 제주어로 생이는 새, 기정은 벼랑, 바당은 바다다. 이곳에서는 발아래로 새를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바람만 세게 불뿐 새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한 석양빛으로 감싸인 차귀도가 무척이나 신비롭다. 배 한 척이 길게 꼬리를 달고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지나고 있다. 모든 게 참 근사하다.  


  결국 종점까지 걸어왔다. 도구리 해안에서 발이 빠졌을 때 걷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잠깐 동안 생각했었다. 젖은 발로 남은 8킬로를 걷는 게 버겁기도 했지만 그보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서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맞다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하게 흐를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럴 땐 어떤 경고나 신호가 있을 테니 거기서 멈춰야 한다. 과연 그럴까. 참으로 안일하고 현실 도피적인 생각은 아닐까.

 

  하늘은 인간에게 어떠 경고도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아무런 개입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내가 하고 싶고 바라던 그 길에 수많은 장애와 사고가 나타나면 받아들이자. 놀람도 원망도 말고 그저 무심하고 담담하게.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 역시 받아들이자. 원래 그런 거다. 그러니 길을 묻지 말자. 하고 싶으면 하자. 걷고 싶으면 걷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자.

  나는 오늘 젖은 발로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수월봉에서 좋은 바람을 만나고 바다를 한없이 보았고 일몰의 차귀도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림도 그렸다. 그러다 결국 그 길을 다 걸었다. 

  이 여정이 어디까지 다다르고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올레길을 다 걷지 못할 수도 완주할 수도 있다. 올레길을 완주하면 길은 다른 길로 이어질 것이다.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결국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스케치북을 기어가는 벌레, 올레 12코스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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