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3
모슬포를 '못살포'라 불렀다 한다. 바람이 너무 불어 못살포, 사람이 너무 죽어 못살포. 11코스를 걷는 동안 여러 죽음과 마주했다.
11코스의 첫인상은 마늘 밭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제주의 마늘 생산이 국내 삼십 프로를 차지한다는데 길을 걷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마늘 밭의 규모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몇 시간을 걸어도 마늘 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늘 밭 너머로 커다란 돔을 얹고 있는 모슬봉이 눈에 띈다. 모슬봉은 전체가 공동묘지다. 제주인에게 오름은 삶과 죽음에 밀접하다. 살아서는 오름 곁에 모여 살며 목축을 하고 농사를 짓다가 죽어선 오름에 묻힌다. 오름에 오르면 방목한 소들과 말들을 만나기도 하고 무덤도 하나둘씩 있는데 모슬봉처럼 오름 전체가 공동묘지인 경우는 없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올레길을 공동묘지로 나게 한 데에는 나름의 취지가 있겠지만 오르는 길에도 정상에 올라서도 수많은 무덤이 보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빼곡한 무덤 너머론 마늘 밭이 펼쳐져 있고 집들이 간간이 보인다. 지평선 끝에는 산방산이 우뚝하다. 모슬봉을 내려와 또다시 마늘 밭을 걷는다.
마늘 밭을 한참 걸으니 또다시 공동묘지가 나타나고 밭 가운데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상이 세워져 있다. 무슨 사연인지 알고 싶었으나 설명이 따로 없다. 밭의 경계와 사잇길에는 제주의 돌로 담을 둘렀다. 빗물이 고인 질퍽한 길에서 잠시 난처해하다 밭담을 조심조심 밟으며 겨우 건널 수 있었다.
정난주의 묘소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걸은 길과 다르게 정난주의 묘소는 말끔히 단장되었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야자수가 좌우로 일렬횡대로 호위하듯 서 있다. 정난주가 누구길래 인적 드문 이곳에 묘소를 만들어 놓았을까. 다행히 자세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있다.
정난주의 숙부는 정약용, 정약전이다. 남편은 황사영으로 17세에 장원급제를 할 만큼 귀재였지만 신유박해 때 대역죄인으로 몰려 능지처참 당했다. 같은 천주교도인이었던 아내 정난주는 제주로 유배 보내졌다. 나를 울린 던 건 그다음 대목이다. 제주로 귀양 갈 당시에 정난주에게는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정난주는 제주에 도착하기 전 거쳐가는 섬 추자도에 아들을 몰래 내려놓고 관원들에게는 수장했다고 거짓을 고한다. 아들을 척박한 섬에 남겨두고 떠나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제주 귀양살이는 죽음의 길이라 여겼기에 추자도에 일말의 희망을 바랐을 것이다.
그 후 아들 경한은 추자도 어부 오 씨에게 구조되어 오 씨의 아들로 키워졌다. 추자도에선 오 씨와 황 씨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란다. 어머니 정난주는 제주 본 섬 남쪽 대정에서 아들은 북쪽의 외딴섬 추자도에서 평생을 살아갔다. 살아생전 두 모자는 한 번이라도 만났을까. 추자도에 가면 아들 경한의 무덤이 있다. 죽어서라도 나란히 묻히면 좋을 텐데. 내 짧은 소견일 테고 어머니와 아들은 모자의 연을 잊고 살다 각자의 삶의 터에 묻혔겠지. 대정 사람들에게 공을 베푼 천주교인 정난주의 은덕을 기리고자 이곳에 묘소를 정성스럽게 모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까 그 밭 가운데 있었던 십자가도 정난주 혹은 천주교와 관계있을 수도 있겠다.
정난주의 묘에서 마음이 너무 아팠나, 어쩐지 기가 다 빠진 기분이었다. 터덜터덜 걷다가 나무에 매달린 올레길 안내판을 보고선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곶자왈인데 오후 4시 이후에는 들어가지 말란다. 지금은 4시가 넘었다. 들어가면 안 되겠지. 마침 작은 편의점이 있어 물어보기로 했다. 편의점 벽에는 이곳을 거쳐갔던 올레꾼들의 방명록이 빼꼭히 붙어 있다. 편의점 주인은 지금 시간에 곶자왈에 들어가도 괜찮단다. 동네 주민이라 그런가. 곶자왈을 가볍게 생각하는 듯하다. 오늘은 그만 걷자.
이 결정은 옳았다. 다음 날 곶자왈에 들어가서 얼마나 놀랐던지.
너무 하십니다. 주인아주머니 말씀 믿고 오후 5시 무렵에 혼자 곶자왈에 들어갔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날 J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곶자왈은 처음 인 데다 여자 혼자 가지 말라, 오후 4시 이후엔 들어가지 말라는 엄포가 단단히 있는 지라 J에게 부탁했다. J는 올레길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겠냐며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다.
곶자왈은 제주어로 어수선한 숲이란 뜻이다. 제주 곶자왈은 아주 독특한 숲이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여 나무와 덩굴, 가시덤불과 암석이 뒤섞여 자라는 숲으로 육지에선 볼 수 없을뿐더러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곶자왈에 들어서면 우선 바깥과 다른 어둠에 놀란다. 이리저리 뻗은 나뭇가지와 무성한 잎이 하늘을 가리고 숲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나무와 식물들이 빽빽하다. 구불구불한 나뭇가지는 꿈틀거릴 것 같고 심지어 감정도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곶자왈 초입에서 떠들고 장난치던 J도 숲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올레 리본 찾기에 집중하며 걷는다. 무릉 곶자왈은 울퉁불퉁한 돌길이라 앉아서 쉬어갈 만한 데가 없다. 이름 모를 야생화에 심상치 않은 식물과 나무들 사이로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 스사삭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곶자왈 배경의 공포 영화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겨우 방석 깔 자리를 발견하고 앉았다. 곶자왈의 식물들은 허공에 갈겨 놓은 낙서 같다. 나도 낙서하듯 이리저리 펜을 움직여 초스피드로 그림을 끝냈다. 막상 그리기 시작하니 어찌나 흥미롭던지 곶자왈에 매력에 푹 빠져버려 무서움을 잠시 잊었다.
난생처음 보는 야생의 원시림에 감탄하다 길을 잃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올레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다. J도 허둥대기 시작한다. 여자인 나야 당연하지만 남자인 당신은 왜 무섭냐고 물었더니, "자연의 기에 눌려서."라고 답한다. 그렇지. 이 정도의 깊은 숲이라면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우리는 길을 되돌려 걸으며 마지막에 보았던 리본을 겨우 찾았다. 숲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데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나무도 리본도 흐릿해 보여 몇 번을 더 헤맸다. 곶자왈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곶자왈에서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둠에 갇힐 뻔했다. J는 곶자왈의 위세에 단단히 눌려 앞으로 절대 곶자왈에 혼자 가지 말란다. 올레길에 곶자왈이 몇 군데 더 있다 하니 같이 걸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 역시 곶자왈이 무섭다. 혼자 들어가는 건 어림도 없다. 그런데 그토록 무서우면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건 왜인지. 나는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한 곶자왈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곶자왈이 자꾸자꾸 떠오르고 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다. 특히 사방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한 자락 쏟아지는 빛줄기에 눈부시게 빛나는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금까지 걸었던 올레 코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가 또 바뀌었다. 11코스의 무릉 곶자왈이다.
올레 11코스는 죽음의 코스다. 못살포라 불리는 모슬포, 오름의 공동묘지, 많은 무덤들과 밭 가운데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정난주의 묘. 그리고 무섭고도 아름다운 곶자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