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2
내가 제주에서 살겠다 했을 때 엄마는 담담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만 그랬을 뿐 엄마는 몇 달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과 허전함으로 힘들었다는 엄마.
엄마와 나는 무덤덤한 모녀지간이었다. 나는 살갑지 못한 큰딸이고 엄마는 감정 표현엔 서툰 여장부 스타일이다. 그랬던 엄마와 내가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날마다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엄마는 예쁜 꽃 사진이나 감성 가득한 영상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엄마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여태 몰랐기에 엄마의 변화가 어리둥절 했다.
몇 해 전부터 엄마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연골이 약해져서다. 엄마 말로는 부처님께 절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다는데 그도 원인이겠지만 대체적으로 엄마는 참 많이 걷는 편이다. 누구보다 빨리 걷고 자전거도 쌩쌩 타던 엄마가 다리를 절며 걷는 모습을 보는 건...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할 텐데 직장 때문에 시간이 없다면 수술을 차일피일 미룬 엄마. 그러다 내가 제주에 가니 그제야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수술 날짜를 받았다. 수술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엄마는 혼자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왔다.
엄마가 제주에 오고 나서야 그동안 엄마와 둘이서 한 번도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엄마와 목욕탕에 함께 간 것도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니 우린 참 데면데면한 모녀 지간이었다. 나는 엄마와의 여행에 들떠 여행지를 고르고 골랐다. 한 달이란 시간이 있다. 여태 엄마와 함께 하지 못했던 것들, 시간들, 나누지 못했던 일들을 다 하고 싶었다.
내가 올레길 여행 중이라 했더니 엄마가 함께 걷자 한다.
걸을 수 있겠어, 엄마?
"그러엄. 너보다 잘 걸을 걸."
마침 가파도에서 유명한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다. 일단 가파도부터 가기로 했다. 올레 10-1코스 가파도는 엄마와 단 둘이 떠나는 첫 여행지였다.
올레길 스물여섯 개 코스에는 섬이 세 개 들어있다. 우도, 가파도, 추자도다. 가파도 올레길은 5킬로 거리로 올레길 전체 코스 중 가장 짧다. 5 킬로면 엄마도 무리되지 않을 거리고 나의 역사적인(?) 프로젝트 올레길 완주에 엄마와 한 코스 정도 함께 걷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마냥 신이 났다. 내가 올레길을 걷는다니 늘 걱정하던 엄마였는데 이번 기회에 올레길의 매력도 보여 줄 수 있다. 이래저래 가파도는 엄마와 함께 할 여행지로 딱 좋다.
납작한 가오리 모양의 가파도는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무인도였으나 국유 목장으로 조성되면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4.2킬로의 해안선을 가진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선 가장 낮고 작은 섬이다. 얼마나 작고 고도가 낮은지 섬 어디에서나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파도에서는 보리를 재배한다. 총 17만 평 규모의 보리밭은 가파도 전체를 덮었다.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제주 본 섬과 가파도를 왕복하는 배가 10분마다 오가지만 평소에는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두 시간에 한 번씩만 배가 오간다. 그야말로 한가로운 섬이다.
가파도에 가려면 모슬포 항에서 배를 타야 한다. 본 섬과 가파도의 거리는 5.5킬로지만 거센 조류 해역권으로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배는 운항하지 않는다. 엄마와 내가 가파도에 간 날은 날이 좋았다. 축제 하루 전날이라 사람도 많지 않아서 한적하게 마음껏 가파도를 누릴 수 있었다.
가파도 올레길은 배가 닿는 상동 포구에서 길이 시작해 해안과 마을, 청보리밭 사잇길로 걷다 하동 포구에서 길이 끝난다. 두 시간이면 충분히 걷고도 남지만 가파도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 두 시간만으론 부족하다.
가파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우도가 보석 같은 섬이라면 가파도는 휴식 같은 섬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섬,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 하늘과 바다, 상냥한 바람이 불어온다. 탁 트인 시야로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4월의 가파도는 봄날의 수채화다. 섬 전체가 청보리 물결로 출렁이는 봄의 가파도는 풋사과처럼 풋풋하다. 봄바람 부는 청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 나에게도 초록물이 들 것만 같다.
가파도에선 마라도가 보이고 본 섬의 산방산과 송악산, 용머리 해안과 형제섬이 배경처럼 둘러 있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모양의 산방산이 우뚝하고 물결처럼 부드러운 송악산이 누웠다. 저 멀리 하늘엔 한라산이 구름 위로 붕 떠있다. 가파도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이 이러하니 가파도 아이들은 어떤 꿈을 꾸며 자랄까.
가파도에선 모든 것이 작다. 파출소도 소방서도 학교도. 가파도 초등학교 운동장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축구공을 뻥 차면 공이 그대로 날아 바다로 빠질 것만 같다.
가파도의 집들은 해안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붕은 전부 주황색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주황색의 지붕 낮은 집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돌담에는 소박한 꽃들이 피어있다. 가파도의 집에선 실제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다. 저런 예쁜 집에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자는 삶은 어떤 삶일까. 집안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이고 푸른 청보리가 넘실대는 곳에서 산다는 것.
가파도에선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보이는 걸 그대로 종이에 옮기면 된다. 그리고 싶은 건 너무도 많지만 마냥 걷고만 싶기도 한 가파도.
마라도가 보이는 해안가 정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중년의 부부가 쉬어가려고 들어오더니 오렌지를 내민다.
"여행하시면서 그림까지 그리시고... 멋지세요."
아내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기분 좋은 찰나의 만남이다. 여행지에서의 또 다른 기쁨이기도 하다.
점심때가 되어 가파도 작은 식당에서 보말과 성게 칼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성게 칼국수에서는 바다 향이 나고 보말 칼국수는 진한 국물에 쫄깃한 보말의 식감이 좋다. 엄마와 나는 이게 맛있다, 저게 맛있다며 즐거운 식사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다시 길을 걸었다.
엄마는 여전히 잘 걷는다. 가파도에선 엄마의 저는 다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푸른 청보리 사이로 천천히 걷는 엄마의 뒷모습을 여러 장 사진 찍었다. 자연 속에서 천천히 걷는 엄마의 뒷모습은 낯설면서도 정겹다. 같이 걸으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걸음의 엄마가 여유롭게 걷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청보리 밭의 엄마는 부드럽고 평안해 보인다. 엄마는 지금 휴식 같은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핸드폰 충전을 위해 포구의 대합실에 갔다.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배가 들어올 시간이 삼십 분 정도 남았다. 가파도의 배경인 송악산과 형제섬이 보이는 곳에 앉아 그림을 한 장 더 그렸다. 땡볕에다 마지막 배가 들어올 때였지만 조급함이 전혀 없다. 좀 타면 어떤가. 배가 섬에 다다를 무렵까지만 그리면 되지. 그리다 말면 또 어떻고.
배를 타야 한다. 산방산은 결국 그려 넣지 못했다. 역시 좀 아쉽긴 하네. 다음에 가파도에 오면 산방산부터 그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