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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27. 2017

찬란한 금빛 노을 속으로 _ 제주올레 10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1

  올레 9코스는 낙석 위험으로 잠정적 폐쇄되어 갈 수 없어 10코스 시작 지점인 화순 금모래 해변부터 걷기 시작했다. 화순 금모래 해변은 제주의 다른 해변과 달리 미끄럼틀이 있는 수영장이 바닷가에 설치되었다. 여름에는 가족 단위 피서지로 인기가 많은가 본데 아무도 없는 해변을 혼자 걸으니 인근의 화력 발전소와 건물들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해변 끝에 다다르자 올레길은 야산으로 이어진다. 드넓은 해변을 걷다 잡목이 무성한 숲에 들어서니 당황스럽다. 올레 가이드 책자에도 이곳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올레 리본을 발견하곤 안심했다. 우거진 풀밭에서 뱀이라도 나올 것 같아 잔뜩 위축되어 걷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십 대 후반 혹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청바지에 셔츠 차림이다. 올레꾼이라기에는 옷차림이 가볍다. 배낭에 챙모자, 등산화에 무거운 카메라까지 들고 있던 나는 좁은 산길에서 청년을 보곤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청년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인적 없는 야산이라 한눈을 팔면 길을 잃을 것만 같은데 길까지 좁으니 청년 옆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저 아래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없다면 깊은 산중이라고 착각할 만한 거친 길이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산비탈을 내려간다. 접근 금지 경고문을 무시하고 내려간 청년을 눈으로 좇으니 뜻밖에도 멋진 해변이 보인다. 석상이 병풍처럼 해변을 두르고 있다. 반달형으로 두른 작은 해변은 고운 모래로 반짝였다. 그런 해변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두 개가 붙어있다. 무인도 같기도 하다. 나는 원시적인 해변의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 청년을 잊었다. 저 부드러운 모래를 맨발로 밟고 멋진 돌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

  붉은 글씨의 접근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신비롭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출입이 금지되었을까. 해변이 작아서 파도가 세면 잠기는 걸까.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이곳에서 캠핑하고 싶다. 정말로 무인도에 와 있는 기분일 거다.



올레 10코스를 걸으며



  무인도를 발견한 기분에 들떠 천천히 해변을 걷는데 절벽 아래로 굴이 있다. 작은 굴 안을 들여다보니 파도에 떠밀려 온 통나무 조각들이 보인다. 굴 입구는 바위 그늘이다. 잠시 앉아 쉬어가기로 했다.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모래는 깃털보다 부드럽게 발바닥을 간질였다. 바위 그늘도 시원했다. 도시락이나 먹고 갈까. 막 배낭을 여는데 그 청년이 걸어오고 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는 거지. 양말 신고 신발 끈 묶고 카메라와 배낭 챙길 시간이 없다. 나는 대범해지기로 했다. 당황한 내색을 애써 감추는 한편으론 가스총 위치를 확인했다. 청년이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내 쪽으로 걸어온다. 이번엔 날 보며 배시시 웃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런데 무슨 우연인지. 청년은 제주에 오기 전까지 내가 살던 도시에서 여행을 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도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 청년이 자꾸 내 맨발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괜히 양말을 벗었다. 지금 신으면 청년이 오해할까. 먼저 가라 할까. 말을 더 걸어볼까. 무슨 질문을 해야 하나. 그때 무인도 해변 쪽에서 한 남자가 빠르고 씩씩하게 걸어온다. 남자는 등산모자에 배낭, 등산화 차림이다. 올레꾼이 분명하다.

  올레길 가세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나는 여태 한 번도 한 적 없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나만 늦게 출발한 게 아니었네요."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J였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다. 남자와 청년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함께 걸어간다. 다행이다. J가 걱정할까 봐 지금 이 상황은 빼놓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하며 핸드폰을 잡고 있다가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쯤 나도 걸었다. 한참을 걸어 해변을 벗어날 무렵 카메라가 떠올랐다. 서둘러 뛰어 바위 그늘로 다시 가보니 카메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정신이 없긴 단단히 없었나 보다. 

  길은 용머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제주에서 내가 순위에 꼽는 자연 중 하나가 용머리 해안이다. 용머리 해안의 기다란 능선이 보이는 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바다를 보며 느긋하게 밥을 먹고 편안히 쉬다 다시 걸었다.

  용머리 해안과 사계 포구를 지나니 해안도로다. 사계 해안도로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석 발견지가 있는데 신석기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새카맣고 드넓은 돌밭 어디쯤에 신선기인의 발자국이 있는지 가까이 가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데 울타리까지 쳐서 보호해 놓았다. 뒤에는 산방산 앞에는 송악산이 펼쳐진 길고 긴 해안도로를 아무 생각 없이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톡톡 친다.

  "저기요."

  돌아보니 그 청년이다. 도대체 몇 번을 놀라게 하는지. 한참을 뒤쳐져 걸었는데 어째서 다시 만났을까.

  "피자 먹고 갈래요?"
  이미 도시락을 먹기도 했지만 그 청년과 마주 앉아 피자를 먹고 싶은 생각이 절대로 없어서 고개 저어 거절하려는데 그 청년이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 형 있잖아요. 아까 거기서 만났던. 그 형이 데려오라고. 저기 저 피자집에 있어요."

  뒤를 돌아보니 정말 피자집이 있다. 창 너머 그 씩씩한 올레꾼 남자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거절하긴 이상한 상황이다. 코스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차라리 동행을 할까. 그게 더 안전한가. 나는 피자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창밖을 보니 지나가더라고요. 근데 되게 늦게 걸어왔네요."

  남자가 피자 접시를 내 앞에 놓으며 붙임성 있게 말을 부친다.

  "난 오늘 송악산까지만 걸으려고요. 너무 늦게 출발해서요. 오늘 오후에 제주에 도착했어요."

  나는 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아이스커피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없다. 피자 집에서 삼십 분이나 머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편안해 보였겠지만 나는 그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불편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도 그들과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송악산은 관광객이 많아서 마음이 좀 편했다. 어느새 일몰이다.

  그런데 일몰이 너무나 아름답다. 지금까지 본 일몰 중에서 가장 멋지다. 금빛 물결로 반짝이는 바닷길은 아주 길게 뻗어 있는데 그 길은 마치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물길처럼 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대로 그 찬란한 빛 속에 녹아 버려도 좋을 것만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감탄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도 감동으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제야 내 마음속에서 경계경보가 해제된 소리가 들렸다.



송악산, 올레 10코스를 걸으며



  우리는 송악산 둘레길을 함께 걸었다. 바다를 보며 걷는 바람 부는 일몰의 둘레길은 또 하나의 환상이었다. 산을 내려와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남자가 커피 한 잔 더 하고 가잔다. 이래저래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코스를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지금 오는 버스가 마지막 버스라 놓칠 수 없어 거절하려는데 남자가 택시를 부를 테니 함께 타고 가잔다. 공항까지 택시비가 4만 원 나온다 했더니 원래 그럴 계획으로 걸었다며 괜찮다 한다. 그곳에 마침 스타벅스가 있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송악산과 식당들만 있는 곳에 번화한 도심지에 있는 스타벅스라니. 어느새 송악산은 어둠으로 휩싸였다.

  청년은 내 생각과 달리 서른한 살이었다. 대평 포구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고 있다. 취직하기 전에 혼자서 제주 여행을 하러 왔다. 군대 가기 전 친구들과 자전거로 제주 일주를 했던 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추억이란다. 그때 가장 좋았던 길이 바로 여기 올레 10코스라고.

  그런데 왜 복장이 그렇게 가벼워요? 올레꾼 아니고 아까 그 무인도 같은 해변 있죠? 그 마을 청년인 줄 알았어요.

  "아. 그냥 조금만 걸으려고 가볍게 나왔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걸었어요. 역시 다시 걸어도 좋네요, 이 길." 

  스타벅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까닥까닥 흔든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나는 왜.

  며칠 후 육지로 돌아간 청년에게 문자가 왔다. 그날 참 좋았다고. 자연에 감탄하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며 행복하란 메시지.

  다음 날 나는 다시 송악산 스타벅스에 갔다. 거기서부터 10코스를 마저 걷기로 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송악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송악산 스타벅스, 올레 10코스를 걸으며



  내가 사람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냥 그렇다. 오해받는 남자들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여자를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남자들은 적어도 여자보다는 세상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나. 나에게도 그런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나는 이렇게 튼튼한 두 다리와 시간이 있는데도 혼자 여행이 쉽지만은 않다.   

   10코스는 지금까지 걸은 올레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화순의 금빛 모래와 작은 무인도 해변, 용머리 해안과 송악산의 일몰까지. 제주는 대체 얼마나 더 나를 감동시키려는 걸까. 나는 앞으로 올레길의 매력에 얼마나 더 빠져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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