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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27. 2017

그 길에는 별이 내린다 _ 제주올레 8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0

  올레길 8코스는 시작부터 올레꾼이 보였다.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저만치 앞서간다. 부부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길가의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즐겁게 웃는다. 길을 걷기에 더없이 좋은 화창한 날이다. 나는 부부의 뒤에서 좀 떨어져 걸었다. J도 같이 걸으면 좀 좋아. 할 수 없지. 오늘도 혼자 걷는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웅전이 있는 약천사를 지나는데 울긋불긋한 화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절 마당과 웅장한 법당이 예사롭지 않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의 높이가 상당하다. 엄마도 이 절을 알고 있을까. 어쩐 일인지 대웅전에서 절을 하고 싶어 졌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삼배를 올리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보살님, 보살님, 초파일 등 달고 가세요."

  그냥 가기 뭐 해 등 값을 내드렸더니 종이를 주면서 소원을 적으란다. 불심 깊은 엄마가 평소에 열심히 등 달고 기도해서 나는 괜찮다 하니 그건 엄마 복이지 내 복이 아니란다. 그러면 그동안 엄마가 날 위해 드린 기도는 모두 도루 아미타불이라는 건가. 소원을 적었더니 하나 더 쓰란다. 어쨌든 오늘의 길도 무사하겠네.


  대포 주상절리대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왁자지껄하다. 처음 대포 주상절리대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육각형의 연필 같은 거대한 돌이 바닷가 절벽 아래 빼곡히 박혀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주의 천혜 자연에 새삼 감동했었다.

  길은 별빛이 비치는 개울이라는 베릿내 오름으로 이어진다. 긴 계단을 오르니 두 갈래 길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별다른 표시가 없어 오른쪽의 비탈길이 아닌 죽 뻗은 데크 길을 택했다. 베릿내 오름은 칠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천제연 폭포로 연결되지만 올레길에선 폭포 쪽으로 못 가게 막아 놓았다. 나무 데크를 설치한 베릿내 오름 둘레길 저 아래로는 숲과 공원이 보이고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높은 곳을 걷자니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 자꾸만 둘레길을 맴도는 게 아닌가. 올레 센터에 여러 번 전화해서 길을 물었는데도 헤매는 건 마찬가지다. 베릿내 오름에서 헤매는 사람은 나만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갈래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다시 걸어보고 이번에도 헤매면 포기하고 내려가자 마음먹었는데 계단으로 남자 셋이 올라오고 있다. 나에게 길을 묻는다. 나도 헤매는 중이지만 어쨌든 이 길은 아니라며 다른 길을 가리켰다. 그러곤 나도 같이 걸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혼자 헤매는 것보다 여럿이 가면 쉽게 길을 찾겠지 했는데 또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나까지 포함 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어 드디어 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이거 꼭 여우한테 홀린 기분인데요."

  지금까지 올레길을 걸으면서 인원이 가장 많은 팀을 만났고 잠깐이지만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여 나름 의미가 있었는데 여우라니. 남자들은 직장 동료로 부산에서 출장을 왔다가 잠깐 올레길을 걸어보려고 나왔다며 이제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고 한다. 잠깐이었지만 길을 헤맨 덕분(?)에 유쾌했던 동행을 끝내고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그들과 헤어진 후 오름을 내려와 산책로가 잘 조성된 공원에서 나는 또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번을 더 제자리걸음을 했다. 부처님께 절도하고 왔구만 왜 자꾸 헤매는 거야.

  

  여러 번 길을 잃은 바람에 예상 시간을 초과해 중문 색달 해변에 도착했다. 색달 해변은 제주 남쪽 서귀포에서 가장 크고 인기 많은 해변이다. 유난히 푸른 바다 물빛과 시커먼 돌이 있는 해변에선 웨딩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신부의 드레스 자락이 바다와 참 잘 어울린다.

  올레길은 중문 관광단지를 지난다. 십 년 전 제주 여행 때 갔었던 테디베어 박물관을 지나자 문득 들어가 보고 싶었다. 십 년 전에는 드라마 영향으로 꽤 인기 많았는데 지금은 관람객이 별로 없다. 공원으로 나가보니 세월의 흔적으로 조각과 구조물들이 퇴색되었다. 유리장 속에 전시된 테디 베어 인형만은 여전한데 십 년 전과 달리 별 감동이 없다. 나도 세월의 흔적은 피할 수가 없는 거다.

  예래 생태마을에는 온갖 식물과 나무가 심어져 있다. 식물 학습장으로도 이용되는지 이름표와 설명서가 적힌 안내판이 쪼르르 놓여 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꽃들과 눈을 맞추며 걸었다. 올레길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가로 길이 나있다. 동화 속 세상에라도 들어온 기분인데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이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식물보다 내가 더 희한한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바라본다.  

  생태마을을 지나니 바닷길인 열리 해안도로다. 전망 좋은 곳에 퍼걸러가 있어 도시락을 먹으며 쉬었다 가려는데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먹지 못하고 곧장 대평 포구로 갔다. 8코스의 종점이다.


  대평 포구는 서사적인 미학을 담고 있다. 철사로 만든 해녀 동상, 포구를 병풍처럼 두른 기암절벽 박수기정, 언덕 위 하얀 집까지 올레길에서 만난 포구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포구다. 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했을 때도 이곳에서 그림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대평 포구가 있는 마을에선 며칠 묵어가고 싶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이 조그만 마을에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가 제법 많다.

  대평 포구는 8코스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작이지만 현재는 낙석 위험으로 9코스가 폐쇄되었다. 이쪽과 저쪽을 막은 바다의 성벽 같은 박수기정 위에서 9코스가 시작하는 것 같은데 못 간다니 아쉽다.

   박수기정을 마주하고 빨간 등대가 서있다. 빨간 등대는 나도 많이 그렸을 만큼 제주 어느 바다에 가나 늘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평 포구의 빨간 등대는 조금 더 특별하다. 등대에 소녀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향해 가슴을 죽 내밀고 있는 소녀는 그대로 한 장의 그림엽서다. 나도 등대에 올라 바다를 보고 싶다. 하지만 출입 금지일 텐데. 챙 넓은 모자가 잘 어울리는 담대하고 멋진 소녀다. 소녀가 등대에서 내려오면 말을 걸고 싶다.

  등대 가까이 다가가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소녀가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있다. 가까이 가니 소녀는 동상이었다. 소녀가 동상일 거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실은 등대에 올라갔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걸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동네 바보 소녀가 아닐까 했다. 긴 여행 중이라 헛것을 자주 보고 툭하면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웃음이 나왔다. 흐뭇하다. 우스운 건 알겠는데 왜 흐뭇한 건지.

  그런데 오늘의 날씨, 너무 뜨겁다. 자외선이 모공 속으로 침투되는 게 상상될 정도다. 저 소녀를 그리려면 땡볕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그림은 또 왜 이리 마음에 드는지 멈출 수가 없다. 그런 날이 있다. 뮤즈의 신이 찾아오는 그런 날.



소녀와 등대, 올레 8코스를 걸으며

  



  


  그때 조용한 포구를 울리는 벨 소리. J였다. 전화를 받는 대신 그림을 찍어 보냈다. 그런데 핸드폰 카메라로 찍힌 그림이 실제의 색과 다르다. 환상적인 보랏빛. 어찌 된 거지. 지독한 자외선 때문일까. 아니면 역시 뮤즈의 신? 소녀와 등대, 오늘의 여행을 환상적인 색감으로 바꾸어준 뮤즈의 신.





  '와~ 대박.'

  J에게 답문이 왔다. 혼자 여행을 하는 날이면 문득 이렇게 J가 전화를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내가 있는 장소나 혹은 그때 하고 있는 걸 사진으로 찍어서 보낸다. 그러면 J가 알아듣는다.

  소녀의 등대를 다 그렸는데도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지만 뮤즈의 신이 온 날이니 이 느낌 그대로 박수기정도 그렸다.



박수기정, 올레 8코스를 걸으며



  뮤즈의 신. 뭔 개똥 같은 소리냐고 세상이 흉흉한 판에 혼자 다니다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좋은데.

  걷기 여행을 하다 보면 길을 헤맬 때도 동상에게 홀릴 때도 있지만 이렇게 뮤즈가 찾아오는 날도 있는 거다. 정말이지 길을 걷는 건 인생과 너무 닮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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