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9
'제주 산간 지역 호우 경보'
국민 안전처에서 문자가 왔다. 비 오는 날을 기다렸기에 호우 경보가 반가웠다. 안전에 유의하라고 문자까지 발송했는데 반갑다니. 엉또 폭포를 보기 위해서다. 쏟아지는 물을 보려면 비가 이만저만 내려선 안 되고 최소 70미리 이상은 내려야 한다.
엉또 폭포는 나이아가라, 이과수, 빅토리아에 이어 세계 4대 폭포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계 4대 폭포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평소엔 그저 바짝 마른 절벽일 뿐인 엉또 폭포가 세계적인 폭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니 심히 의심쩍다. 하지만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을 실제로 보면 의심은 단박에 사라진다. 엉또 폭포의 아찔한 물줄기는 어질어질해서 오래 볼 수도 없다.
엉또 폭포의 물을 보려고 비가 온 다음 날 올레 7-1코스에 나섰다. 전날까지 쉴 새 없이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날이 화창하다 못해 덥기까지 하다. 제주 날씨가 그렇다. 오락가락 변화무쌍. 날씨가 이러니 마른 폭포를 보겠지만 나섰으니 갈 수밖에.
7-1코스는 순전히 엉또 폭포 때문에 올레길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게 다른 코스와 달리 자연 속의 길보다는 주로 도심지를 걷는다. 아파트와 차량 통행이 많은 도로를 걷다가 갑자기 길이 한적해지면서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엉또 폭포를 마주하면 진짜로 신기하다.
엉또 폭포의 높이는 50미터로 나이아가라와 비슷하며 세계에서 유일한 물이 내리지 않는 폭포다. 평소의 엉또 폭포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깎아지른 절벽인데 그 자체로도 어마어마하게 멋지다. 엉또 폭포에 물이 터지면 일단 산중을 쩌렁저렁 울리는 물소리로 압도당한다. 하늘나라에서 만든 두레박으로 들이붓는 엄청난 양의 물은 안개와 물보라에 휩싸여 신비롭기 그지없다.
귀하디 귀한 구경거리다. 많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엉또 폭포를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린다. 그런 날은 차량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도로는 주차장으로 바뀐다. 가까스로 차를 주차한 후에는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우비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같은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 또한 이색적이다.
나는 물이 쏟아지는 엉또 폭포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비를 피해 그림 그릴만한 자리도 없지만 사진을 찍으려고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자리를 차지하고 오래 있을 수도 없다. 난리통에 스케치북이 찢기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늘은 비가 그치고 하늘도 쨍쨍하니 물은 볼 수 없어도 사람들 또한 몰릴 일 없으니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엉또 폭포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한 사람도 없다. 차별도 심하지. 물 없는 엉또 폭포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울창한 산중에 깎아지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기세 등등한 엉또 폭포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적인데 아무도 없이 혼자 있으려니 으스스하다. 내가 아니라 엉또 폭포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폭포 아래는 웅덩이가 있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물이 가득 고여 있다. 깊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짙은 쪽빛의 물빛은 매우 맑고 아름답다. 선녀라도 와서 목욕을 할 것 같은데 척 보기에도 물이 차다. 가까이에서 물을 보려고 내려가는데 길이 따로 나지 않아서 풀과 바위를 밟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들리는 소리.
긱 긱 기이익 기익 기익.
기괴하고 불쾌하며 소름 끼치는 소리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소리의 정체는 보이지 않는다. 엉또 폭포에서 살고 있다는 황조롱이일까. 황조롱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상상 속의 그놈은 부리부리한 눈에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절벽 끝 숲속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내게로 와락 덤벼드는 커다란 새의 환시에 나는 물가에 내려가는 걸 포기했다.
비탈에 적당히 자리 잡고 손바닥만 한 방석을 깔고 앉았다. 스케치북을 펼치고 폭포를 바라보았다. 절벽의 물길을 따라 위부터 아래로 죽 훑어내린다. 어마 무시한 자연이다. 나 같은 그림 초짜가 그리기엔 만만치 않다. 근데 내가 언제 그림 소재를 가렸나. 나는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무조건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자연을 좋아해서 맨날 자연만 그려서 좀 그렇긴 하지만 자연은 넘치고 넘쳐나니 나는 평생 자연만 그려도 그릴 것이 끝도 없이 많아 좋다.
갑자기 등이 싸하다. 뒤돌아 보아도 아무도 없다. 다시 그림을 그렸다. 엉또 폭포는 물이 내리지 않아도 멋지다. 산신령이라도 스윽 나타날 분위기다. 깎아지른 절벽은 환상적인 색채로 가득하다. 돌이 이렇게 멋진 색을 안고 있다니. 물 웅덩이에는 절벽의 그림자가 비친다. 물속에 산이 들어 있다. 바위와 나무 색이 그대로 물에 나타났다. 물속 세상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 얼른 채색하고 싶다.
물감을 막 꺼내는데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남자가 저 아래로 내려갈까 하니 여자가 싫다며 혼자 가란다. 곧이어 어이쿠, 미끄럽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가 내 옆 서너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 섰다. 남자는 오십대로 보인다.
"그, 그림 그리시는 구나..."
놀란 눈치다. 하긴 이 깊은 산중에 웬 여자 혼자 앉아 있으니. 나는 대꾸도 안 하고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애매한 상황에서는 포스 있게, 진지하게, 심각하게 그림을 그리는 척하면 대개의 상대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금방 자리를 뜬다.
또다시 황조롱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비웃는 듯한 소리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나는 그제야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남자도 인사를 한다.
"그런데 저... 저기 꼭대기에 있는 거 말입니다. 저거 뭐 같아요?"
네?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기, 저거 말입니다. 꼭 토끼 같지 않아요?"
남자가 엉또 폭포 꼭대기에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다.
토끼요? 설마요. 토끼가 왜 절벽 끝에...
갑자기 뭔가 살풋, 움직였다.
내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그림에도 있다! 절벽 끄트머리의 삐죽 나온 돌인 줄 알고 그렸는데 토끼라니. 깜짝 놀라 다시 절벽 끝을 보니 돌, 아니 토끼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토끼는 절벽의 돌과 똑같은 황색 토끼였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그게 살아있는 짐승일 거라는 생각은 1프로도 하지 않았다. 토끼가 사라지자 남자는 "그럼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다시 혼자다. 선녀탕을 채색하려고 물감을 풀었다.
그나저나 그 토끼는 겁도 없나. 왜 절벽 끝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던 걸까. 토끼를 포함해 절벽 꼭대기부터 그려 아래로 내려와 선녀탕을 막 채색하려 했을 때 남자가 다가왔었다. 시간이 약 한 시간 정도 흘렀는데 그때까지 토끼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앉아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있었던 걸까.
웅덩이를 채색한다. 물을 꼼꼼하게 칠하고 싶은데 아까부터 자꾸 등이 근질근질하다. 혹시 뱀? 지금 뱀 나오는 계절 맞지. 온갖 상상이 보인다. 저기 왼쪽의 깊은 숲에서 여우가 나타나고 황조롱이가 날아오고... 혹시 그 토끼는 황조롱이에게 쫓기고 쫓겨 절벽 끝까지 이른 건 아닐까.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자 돌인 척 꼼짝도 않고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황조롱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황조롱이는 무얼 먹고사나...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다.